19.11.13 07:41최종 업데이트 19.11.13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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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아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격주 수요일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으로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는 한국 언론에 대한 고발이자, 몸으로 경험한 '한국 언론 50년의 역사'다. [편집자말]
 

정연주 전 KBS사장이 제46주년 방송의 날인 2009년 9월 3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에서 열리는 언론악법 원천무효 서명운동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 참석했다. 서명대 주위 가로수에는 정연주 전 사장이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시절 최초로 사용한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단어가 포함된 구호가 붙어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검찰에게 정의나 공익이란 없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경각에 걸리거나 말거나, 남의 인생이 망가지거나 말거나지. 오직 그들의 전리품을 위해서 움직일 뿐야."

검사 출신의 이연주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다. 이 변호사는 그러면서 검찰의 사건 만들기 과정을 김밥 만드는 것에 빗대어 '사건을 말다'라는 표현을 썼다. 검사들이 그렇게 부르는 모양인지 "사건 잘 말았다"라거나 "사건이 똘똘 잘 말려 있다"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안 되는 사건을 억지로 엮었으니 김밥 옆구리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겠지"라고 검사의 행태를 꼬집기도 했고, "검찰이 합심해서 똘똘 만 정경심 교수는 어쩔 도리가 있었겠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검찰이 사건을 '말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코 그들이 필요한 내용만 취사선택하기 마련이다. 검찰이 오로지 그들의 전리품을 위해 사건을 만드는 취사선택의 내막을 이연주 변호사는 안태근 전 검찰국장(서지현 검사 성추행 뒤 인사보복 혐의로 1심에서 2년 실형 선고, 법정 구속)의 발언을 빌려 설명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조차 자신의 형사사건 때 "밀행적으로 진행되는 수사 절차에서는 검사의 의도에 맞춰 질문과 답변, 조서 내용의 정리가 행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검사의 의도'에 맞춰 필요한 내용 취사선택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보복을 가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안태근 전 검사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이 '밀행적으로 진행되는 수사절차'에서 '검사의 의도'에 맞춰 취사선택을 하는 사례는 < PD수첩 > 사건의 무혐의를 주장하다 수사라인에서 제외되고 결국 검찰을 떠난 임수빈 변호사의 저서 <검찰은 문관이다>에 자세하게 나온다. 한명숙 전 총리의 2차 사건 때 핵심 증인이었던 한만호 전 한신건영 사장에 대해 "검찰은 (그를) 수십 회 소환했지만 단 1회의 진술서와 5회의 진술 조서만 남아 있다"고 임 변호사는 언급한다. 수십 회나 불러다 조사를 해 놓고 '검사의 입맛'에 맞는 1회와 5회의 진술 조서만 증거로 남겼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취사선택인 셈인데, 범죄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검찰이 배임으로 엮은 나의 사건은 지난 글(http://omn.kr/1lgat)에서 밝힌 대로 황당할 정도로 엉성했다. 이연주 변호사의 표현을 빌리면 '김밥을 잘못 말아서 옆구리가 다 터져버린 꼴'이다. 검찰의 주장과 논리는 오로지 한 쪽만 쳐다보면서 만들어 놓은 공소장이나 다름 없었다.

"검찰에게 정의나 공익이란 없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경각에 걸리거나 말거나, 남의 인생이 망가지거나 말거나지. 오직 그들의 전리품을 위해서 움직일 뿐야."

KBS 사장직 해임이라는, MB 정권이 절실하게 원했던 '전리품'을 얻기 위해 충성을 다한 정치검찰의 행태를 직접 겪어보니, 이연주 변호사의 저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민주주의가 경각에 걸리거나 말거나, 남의 인생이 망가지거나 말거나, 무죄가 나와도 좋으니 무조건 기소부터 하라는 집단 아닌가.

김밥 잘못 말아 옆구리 터진 꼴, 나의 배임 사건
 

10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정연주의 증언> 출판 기념 저자와의 대화 '이명박 정권은 왜 정연주를 제거하려 했는가?'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내가 배임으로 기소된 날은 2008년 8월 20일이다. 수사기록으로 A4 용지 6천 쪽과 함께 날아온 공소장의 얼개는 대략 이러했다.
 
1. 1심 승소사건(17건 소송 가운데 KBS가 7승 9패, 미선고 1)은 상급심에서도 승소가 매우 유력하여 1심 승소금액을 모두 환급받을 수 있었다.
2. 그런데도 KBS의 재정적자로 인한 퇴진압박에서 벗어나고 또한 연임하려는 개인적 목적으로 서둘러 법원의 조정에 응했다.
3. 이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법률 검토도 없었다.
4. 국세청은 KBS의 특수성(수신료와 광고수입의 분리회계가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과세 기준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세금 재부과가 불가능하다.
5. 법원 조정으로 사건을 종결함으로써 재산상 이익을 국가에 취득하게 하고, 같은 금액의 재산상 피해를 KBS에 가하였다.

이런 엉성한 얼개를 가진 검찰 공소장의 실제 문장도 한심할 정도였다.
 
"공사(KBS 지칭)의 특수성으로 인해 추계조사 방법에 의한 세액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당시 공사가 상급심에서 승소 가능성이 매우 높아"

검찰은 이렇게 '가능성도 거의 없어' '가능성이 매우 높아' 처럼 확률에 바탕을 두고, 내게 죄명도 무시무시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을 씌우고, 징역형 5년을 구형했다. 100%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만 범죄가 구성되는 것인데도 검찰은 '가능성도 거의 없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등의 확률, 또는 심증으로 내게 죄를 덮어 씌웠던 것이다.

검찰·언론의 완벽한 앙상블
 

2008년 7월 19일자 조선일보 사설 < "KBS 정연주씨, 사장 더 하려 국민에게 1500억 손해 끼쳤나"> ⓒ 조선일보 지면

 
검찰이 나를 기소한 날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2008년 8월 20일이다. 그런데 기소하기 훨씬 전부터 언론은 검찰이 흘려준 피의사실을 근거로 나를 어마어마한 금액의 배임을 저지른 중범죄인,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웠다.

<조선일보>는 기소되기 한 달 전인 7월 19일자 사설에서 아예 나를 배임 확정범으로 지목했다. "KBS 정연주씨, 사장 더 하려 국민에게 1500억 손해 끼쳤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정씨의 행위는 국민에 대한 배임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공영방송 사장 자리에 계속 놓아둘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중앙일보>는 7월 22일자 기사에서 "정사장, 자리 지키려 1784억 포기"라고 배임범으로 확정지었다. <동아일보>는 8월 14일 자 '배임 액수 너무 커 사기업 사장이면 구속감' 기사에서 구속을 당연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소도 되기 전에 이렇게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인격 살해의 죄를 언론은 서슴없이 저질렀다. 정치 검찰은 그들의 전리품을 위해 사건을 거침없이 만들고, 언론은 브레이크 없는 그 정치검찰의 범죄 만들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검찰의 눈으로 사건을 보고, 검찰의 논리에 맞춰 사건을 해석하고, 검찰의 프레임 속에서 사건을 정리했다. 검언 복합체의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1심 재판은 2008년 10월 2일 열려 이듬해 8월 18일 판결 때까지 10개월 넘게 진행되었다. 20명의 증인을 상대로 한 심문이 있었고, 법정에 제출된 증거자료만도 6천 쪽에 이르는 검찰 수사기록에 더하여 변호인단의 증거자료까지 엄청난 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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