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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되어 말하는 김지영, 그것에 담긴 '진실'

[리뷰]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지영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19.11.01 19:42최종업데이트19.11.0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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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글에는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너와 나의 이야기'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메인 홍보영상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모순 가득한 이 문장을 본 순간, 내 마음은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영화 속 김지영이 해질녘이면 마음이 내려 앉는다고 말했듯).

개봉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다 드디어 지난 주말 '82년 생 김지영'을 만났다. 이름만큼이나 지극히 평범한 82년 생 김지영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는 어떻게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됐는지를 너무나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목소리'에 담긴 진실
 
26개월 된 딸을 키우며 지극히 평범한 아기엄마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김지영(정유미). 가끔씩 기억이 잘 안 나고 해질녘 마음이 쿵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지영은 큰 문제없이 살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지영은 갑자기 친정엄마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남편 대현(공유)은 아내의 이런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대현은 아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말하는 모습 자체에 놀란다. 하지만 내겐 지영의 변화 자체보다 지영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내용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명절에 시가에서 설거지를 하던 지영은 친정에 가려고 준비하던 중 시누가족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사부인, 나도 내 딸 보고 싶어요. 내 딸도 집에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웃으며 시가 식구들에게 맞춰주고 있던 지영의 깊은 속마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어느 날 밤, 홀로 맥주를 마시던 지영은 대학시절 무척이나 따르던 선배 언니의 목소리를 빌려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지영이한테 좀 잘 해. 걔 요즘 힘들어." 평소 남편에게 "괜찮다. 별거 아니다" 했던 모습 속에 숨겨진 진심이었다. 또한 시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일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던 날, 지영은 한걸음에 달려와 "엄마가 일 정리하고 도와줄게"라는 친정엄마에게 친정엄마의 엄마가 되어 말한다. "네가 희생하며 산 것 다 안다. 이제 그만 희생하라"고.

김지영이 '다른 목소리'로 말한 내용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했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하지만 전혀 티내지 않고 감춰 온 마음 속 진실들. 김지영은 이런 진실들을 말하고 싶을 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린다. 도대체 왜 김지영은 자신의 진심을 '다른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김지영(정유미)은 26개월이 된 딸과 함께 평범한 아기엄마의 일상을 살아간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다른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영의 과거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지영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해준다. 유독 남동생만 예뻐하는 할머니는 어린 시절 김지영과 언니 은영(공민정)에게 수시로 "계집애들이 목소리가 크다"며 조용히 엄마나 도우라고 이른다.

아버지 영수(이얼)는 악의는 없지만, 당연한 듯 아들 지석(김성철)에게 늘 더 좋은 것을 준다. 청소년기 성폭력의 위기를 경험한 지영에게 아버지는 "치마가 짧다. 니가 더 조신하게 해야지. 학원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라"라고 대꾸한다. 이런 메시지들은 어릴 적 언니와 떠들며 "미국에 가고 싶다"던 꿈 많던 소녀 지영에게 여성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목소리로>의 저자이자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이 일련의 저서들을 통해 이야기 해온 소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길리건은 유년기에서 청소년기에 걸쳐 많은 소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소녀들이 전통적 성역할을 학습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부장제가 유지되는 심리적 이유를 찾아냈다.

나오미 스나이더와 함께 쓴 최근의 저서 <가부장 무너뜨리기>(2019, 심플라이프)에 따르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경우 타인과의 관계를 잃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어린아이가 '애착'을 통해 생존하듯, 관계는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관계의 상실은 결국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케 한다. 이에 여성들은 관계를 잃는 상실을 맛보지 않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가부장의 질서에 순응해 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억압한 채 맺는 관계는 '진실한 관계'가 될 수 없다. 길리건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나 자신의 목소리를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관계가 결국 진실 되지 못하다는 상실감에서 연유한다고 설명한다.

영화 속 지영도 그랬다. 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조용히 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면화한다. 갈등을 피하고 사랑받기 위해 지영은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맞추는데 익숙해졌을 것이다. 지영이 직장에 다니던 시절, 회의 시간에 김 팀장(박성연)과 남자직원들 사이에 논쟁이 붙는다. 이 때 지영은 "저는 화내실까봐 무서웠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지영이 관계에서의 갈등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관계의 상실을 이토록 두려워하는 지영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보다는 안전할 테니 말이다.
 

대현(공유)은 좋은 남편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지영의 '다른 목소리'의 메시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나의 목소리로 말하기

그렇다면 지영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고, 이를 실천하며 살고 싶은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들 뿐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내면의 욕구가 불일치 할 때,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분열된다. 불일치의 정도가 커지면 이 분열은 다양한 심리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지영이 가끔씩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이 분열이 증상으로 표현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지영이 궁극적으로 치유되는 길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뿐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나 자신의 목소리로 자유롭게 표현해 낼 수 있을 때, 불일치의 간극은 좁아지고 증상들은 사라지게 된다.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영이 커피숍에서 자신을 보고 '맘충'이라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직접 분노를 표현하는 부분은 이런 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초반 공원에서 '맘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 지영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선 그 사람들을 똑똑히 바라보며 "당신들이 나에 대해 뭘 알고 그렇게 표현하느냐"며 항의한다. '다른 목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지영은 정신과의사에게 이 경험에 대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분노를 표현해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은 이 순간, 지영은 통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 내가 '맘충'인가요? 아이를 키우는 게 쉬는 건가요?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 모두의 이야기

영화 속 지영의 시가 식구들은 이런 지영을 보고 "유별나다"며 혀를 끌끌 찬다. 김지영에겐 자상한 남편 대현이 있고, 아들 중심의 가족문화에 반기를 들고 딸들의 진정한 삶을 응원하는 친정엄마가 있다. 또한 젠더감수성 높은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지영을 둘러싼 환경은 대한민국 평균보다 나쁘지 않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분열된 지영을 보고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나는 지영이 전혀 유별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시가와의 갈등으로 속이 부글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날. 억울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세면대의 물을 틀어 놓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평생 해보지 못했던 욕설들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던 경험이 있다. 지영이 말했듯 '가끔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갇혀 있는 느낌'에 우울하게 지냈던 시간도 있었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갑작스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요즘도 가끔씩 경험한다. 친한 이웃과 친구들 역시 종종 이런 느낌들을 호소해온다. 때문에 나는 안다. 지영의 모습은 유별나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임을.

영화 속 지영이 해질 무렵이면 마음이 '쿵'한다고 했던 것이나, 영화 홍보 문구에 '쿵' 했던 내 마음의 소리는 어쩌면 억압된 내면의 목소리가 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말 이 목소리들이 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마음 깊은 곳의 진실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기 자신과 강요된 젠더 이미지와의 간극에서 야기된 분열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성별에 상관없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그렇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는 이제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덧) 캐럴 길리건에 따르면 가부장 사회의 이분법적 성역할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성들도 분열된다. 남성들은 '남자답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의 감정과 접촉하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이는 감정을 배제한 진실하지 못한 관계로 이어진다. 결국 가부장적 성역할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분열을 낳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내면의 진실을 자기의 목소리로 말할 때가 됐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www.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82년생 김지영 정유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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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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