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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같은 남편이랑 사는데 뭐가 힘드냐는 사람들

['김지영'과 나] 평범해서 말하지 못했던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

등록 2019.11.07 19:59수정 2019.11.0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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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82년생 김지영 > 속에서 발견한 저마다의 삶과 사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전에 가까운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해 보인다고. 다들 말은 안 해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본 적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들으면서 조금 놀랐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픈 데 없고, 사지 멀쩡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제도권에 안정적으로 편입했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이도 둘이나 있고, 그렇게 낳은 아이들은 밝고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까. 게다가 양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시고, 빚도 없으시고, 큰 간섭도 하지 않으신다. 남편은 다정하고, 나에게 싫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해야 할 것은 그저 집안 살림과 아이들 돌보기 정도. 낮에 가끔 영화도 보고, 사고 싶은 책을 언제든 사서 읽을 수 있는 여유가 넘치는 삶.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자 행복한 삶이라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괜찮지 않지만 넘어가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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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냥 넘기고 마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이런 순간들이다.

과거에 쓴 일기를 들추어 보다가 누군가를 욕해 놓은 글을 발견했다.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는 내 말에 "그럼 애는 누가 키워요?"라고 되묻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는 호기로운 선언이 무색하게 애들을 돌봐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퇴사하고 말았다. 결국 그 사람 말대로 된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고 쓴웃음을 지은 순간들.

아이들을 붙잡고 씨름하다 폭발해 미치광이처럼 발작했던 어느 밤이었다. 나는 너무 힘든데 육아의 고통이나 고됨을 그 누구도 인정하거나 참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러다가도 다들 이러고 사는 거지,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인생이니 누구 탓을 하겠냐며 마음을 다독이던 순간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이후에는 뭐라도 해보겠다며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보곤 했다. 그때마다 30대 중반의 경력단절 여성, 그것도 아이들 때문에 '칼퇴근'을 해야 하는 여성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매일 새롭게 확인했다.

그 와중에 연봉을 절반으로 깎을 테니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라는 업체들을 마주해야 했다. 어차피 그 돈을 받아봤자 다 베이비시터나 아이돌보미 월급으로 나갈 거, 그냥 내가 애들 보고 만다고 체념 섞인 결심을 한 순간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요' 또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으신가 보네요'라고 물었다. 당신이 운동하고, 산에 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 마시고 하는 시간에 오로지 집에 갇혀서 책만 읽어서 그래요. 애들을 떼놓고 어딜 멀리 갈 수도 없고, 누굴 자유롭게 만날 수도 없어서 책만 읽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순간들.

한 남성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브런치 가게마다 애들 어린이집 보내 놓은 엄마들로 우글거리던데, 그런 여자들 때문에 워킹맘들 피해 보는 거 생각하면 한 대씩 콱 때려 버리고 싶다고.

나는 되묻고 싶었다. 당신이 그 사람들을 아냐고, 그 사람들이 애 엄마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냐고, 그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거기 모여 공부를 하는지, 일을 하는지, 아이들 문제로 상담을 하고 있는지, 혹은 반년을 벼르다 겨우 날을 잡고 모인 옛 친구 모임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혹 그중에 육아휴직 중인 워킹맘이 끼어 있지는 않은지, 재취업 준비를 위해 눈물 흘리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온 사람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닌지 당신이 아느냐고.

그렇게 말하려다가 문득 상대는 물론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나를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찌든 여자로 바라보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던 순간들.

공중 화장실 벽 곳곳에 뚫려 있는 구멍과 그것을 막은 흔적을 볼 때마다 혹시라도 카메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흠칫 놀란다. 지구 어딘가에서 화장실에서의 내 모습이 찍힌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영상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 때문이다. 그러다 순간 그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 평생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마음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순간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상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보다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과 후회를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성희롱과 성차별의 경험들이다. 예를 들면 '원래 남자들끼리만 보는 건데 특별히 보여줄게요'라면서 남자 직원이 공유해줬던 메일. 그 속에 온갖 포털사이트에서 불법 캡처한 예쁜 '여직원'들의 사진이 마치 정육점 고기처럼 등급이 매겨진 채 가득 채워져 있던 순간들.

그런 수많은 순간들을 그냥 넘기고 사는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살 만하니까. 나 정도면 행복하니까. 그러나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저런 기억들이 없던 일들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보다 덜 불행하다는 것이, 아직은 살 만하다는 것이,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나쁜 사람 없어도 상처받을 수 있는 구조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이 개봉 5일 만에 관객 100만을 돌파하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설 < 82년생 김지영 >이 원작으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여성들이 생애 주기를 중심으로 겪는 일들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나 소설을 비판하는 이들은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배부르고 편한 여성이 징징댄다', '과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말이 많다', '요즘 저런 일들을 겪는 여성은 없다'.

물론 영화에서의 김지영(정유미) 역시 나의 삶처럼 누군가가 보기에는 매우 안온하고 살 만한 인생일 수 있다. 아늑한 집도 있고, 남편은 다정하다. 시부모 역시 조금 너무하다 싶은 장면이 몇 있지만 사실 그 정도면 무난한 축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고, 그야말로 평범한 중산층 여성의 삶. 그러나 먹고 살 걱정이 없다는 것이, 집이 있고 사지가 멀쩡하고 남편이 다정하다는 것이, 이전 세대보다 살만해졌다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모욕을 들어도 된다거나 불법촬영의 위협에 노출되거나 명절에 부엌에서 홀로 서서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좌절하는 순간이 닥치더라도, 그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토로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많은 남성들이 걱정하는 것과 다르게 < 82년생 김지영 >은 남성들을 특별히 더 악독하게 그리고 있지 않다. 이는 영화가 여성들이 겪는 서사나 고민의 원인이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인 부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쁜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누군가는 상처받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구조 말이다.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이 다정하고, 김지영의 가족들 역시 지영이를 위해 헌신적임에도 김지영의 정신세계가 서서히 무너지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김지영은 정신과 의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간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데, 괜찮아야 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엉망인 걸까요? 혹시 나만 출구를 못 찾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요."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여성에게 출구가 없다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별 것 아니라는 이유로, 평범하다는 이유로, 누구나 다 겪는다는 이유로 이제껏 묵인되어 오다가 이제야 겨우 말해지기 시작한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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