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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여상규의 또다른 과거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국회의원 여상규'와는 사뭇 달랐던 '법조인 여상규'

등록 2019.10.11 14:47수정 2019.10.1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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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에서 열린 검찰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패스트트랙 수사'관련 내용언급에 여야간 고성이 오가던 법사위원장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김종민 의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이희훈

 
"웃기고 앉았네. XX같은 게."

2019년 국회 국정감사 초반, 논란을 낳은 어록(?)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언쟁을 벌이면서 한 말이다. 상대방을 '뭔가 모자란 사람'으로 낮춰 부르는 비하발언을 공식석상에서 사용한 것.

그의 '막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여 의원은 제작진과의 통화에서 "웃기고 앉아 있네, 이 양반 정말"이라고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 장면은 그대로 공중파를 탔다. 중앙정보부의 간첩조작사건으로 1980년 투옥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석달윤 사건의 담당판사가 여상규 의원이었다. "책임을 느끼지 못하나?"라는 제작진 질문에 화가 나서 그런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2019년 10월 한국 사회의 핫이슈는 '검찰개혁' '사법개혁'이다. 이 상황에서 여 의원이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고 평소 입이 거칠다는 평가를 받으니 그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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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 화심에 있는 의령 여씨 집성촌 전경. ⓒ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상규 의원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접점인 경남 하동 출신이다. 그는 사천시·남해군·하동군을 지역구로 두고 있다. 하동군은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터전을 잡았던 곳으로, 의령 여(余)씨 집성촌이 있다. 의령 여씨는 660년에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왕족의 후예인 송나라(북송) 신하 여선재(余善才)가 의령 여씨의 시초로 전해진다.

백제 왕족은 부여(夫餘)씨였다. 중국인들은 성이 두 글자인 복성(複姓)을 유목민족의 잔재라며 싫어했다. 그런 중국에서 망국 백성인 의자왕 후손들이 정착하려면 한 글자 성을 쓸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 부여의 '餘'와 비슷한 '余' 자를 성으로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정착한 여씨 가문 후예 여선재는 1103년 송나라를 떠나 고려에 귀화했다. 그 뒤 이 집안은 지금의 의령에서 기반을 잡았다. 하동에 집성촌을 형성한 것은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년) 때였다. 한 가문이 오래도록 집단 거주한다는 것은, 양반가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주요기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경제력이 탄탄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였다. 백제에서 중국으로, 다시 고려로 돌아온 뒤 조선 때부터 집성촌을 형성해온 역사를 보면 의령 여씨는 긍지를 가질만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토대 위에서 여상규라는 인물이 배출됐다.

'막말' '버럭' 등의 수식어가 붙는 지금의 평가와 달리 과거의 여상규에게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엘리트로 촉망받았고, 세간의 평도 좋았다.

'판사' 여상규가 걸어온 길
  
대한민국 정부수립 1개월 뒤인 1948년 9월 15일 하동군 악양면에서 출생한 여상규는 하동군 악양초등학교 및 악양중학교, 부산시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1977년(29세) 2월 26일 서울대 제31회 졸업식에서 최규하 총리에게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대학 4년을 수석으로 졸업했던 것.

이듬해인 1978년(30세)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 고승덕 변호사와 동기다. 1980년(32세)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서울지방법원 판사가 된 그는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40세)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로 '사법부 독립요구'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6월 17일 치 <경향신문> '서명 계속, 사법독립운동' 기사에서 여상규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주도적 활동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6월항쟁 이후의 대세인 '법치주의 확립'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법원과 검찰은 6월항쟁 이전만 해도 정권에 대한 강력한 종속성을 보였다. 그러다가 6월항쟁을 계기로 군사정권이 약해지고 법치주의 가치관이 급속히 확산됐다. 이때 법원과 검찰이 독립성을 확보하고 입지를 넓혔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등장한 상징적인 두 인물이 있었으니, 법원 쪽에서는 '대쪽 대법관' 이회창, 검찰 쪽에서는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다. 군사정권 아래서라면 부각되기 힘들었을 두 법조인이 일약 스타가 된 것은 6월항쟁 이후의 법치주의 확산 분위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에 여상규 판사도 올라탔던 것이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법부가 강해지던 시절, 여상규는 시국사건 피의자들에게 집행유예를 많이 선고했다. 1989년(41세) 10월 12일엔 여의도 농민시위로 구속된 이영순 전민련 공동의장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또 6일 뒤인 10월 18일엔 김일성 연설문을 모아 <북한의 통일정책 변천사>를 펴낸 김용항 도서출판 온누리 대표에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2월 15일에는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공동 제작한 전승일 전국대학미술운동 대표에게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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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29일 치 <한겨레>에 실린 문학진 기자의 기사. 기사의 맨 마지막 문장은 "실정법이라는 이름의 악법이 여 판사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였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해 화제가 된 여상규의 발언은 9월 28일에 나왔다. 훗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이 되는 조성우 평화연구소장에 대한 국가보안법 및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사건 결심공판에서 여상규는 법관으로서는 꽤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피고인의 행위가 실정법을 위반한 점은 인정되지만, 애매한 부분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 의견으로는 군사기밀보호법은 법 규정이 매우 모호하고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등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 1989년 9월 29일 치 <한겨레>

여상규는 피고인에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하면서도, 판단의 근거법인 군사기밀보호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군사기밀보호법 개정을 요구하는 당시 여론에 일정 정도 편승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전두환 후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인 상황에서 판사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남긴 한마디가 있다.

"피고인의 목적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절차적 정의를 간과하면 그것은 오류로 판정받을 수밖에 없다." 

'조성우 당신한테는 통일운동의 가치가 정의로울 수 있지만, 현행 실정법에 어긋나므로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 한편으로는 당신이 이해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민청련 사건 구속자 김근태를 가혹하게 괴롭힌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1988년에 보도한 바 있고, 훗날 경기도 하남시에서 제17대 국회의원이 되는 문학진 <한겨레> 기자는 조성우 사건을 보도하면서 "실정법이라는 이름의 악법이 여 판사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라고 기사 말미에 적어놨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여상규를 '진보적 판사'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3년(45세)에 제2대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이름을 딴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가 된 사실은 그가 조선일보식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 그러면서도 6월항쟁 이후의 시국 사건에 대해 비교적 부드러운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두 키워드 : '청렴'과 '효자'

여상규는 다른 일로도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청렴한 판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93년 1월 29일 치 <한겨레>의 '평소 청렴 평판 유망 법관들 경제 사정으로 변호사 개업'이란 기사를 살펴보자. 

"새 정부 출범에 때맞춰 단행되는 2월 말의 법원 정기인사에 법조계 주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평소 청렴하다는 평판을 들어온 유망 법관들이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변호사로 개업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29일 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날 현재까지 사표를 제출하거나 사의를 표명한 법관은 서울고등법원의 서정우 부장판사, 여상규·김희근 고등판사, 부산고등법원과 광주고등법원의 이문재·김완기 부장판사 등 모두 5명이다."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만 근무했고, 또 승진에 문제가 없는데도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여상규의 행동은 주목을 끌었다. 언론에 보도된 그의 경제사정은 '어머니 병환'이었다.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병원비를 판사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변호사 개업을 택했다는 것. 가슴 짠한 사정으로 법복을 벗었던 것이다. 훗날 여상규가 초선 국회의원이 됐을 때 <국회보>는 이 일을 배경으로 '효자판사'라는 네이밍을 붙이기도 했다.

최근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부정적 측면의 보도들과는 결이 다르다. 정의를 위해 앞장선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그에게서는 '양심적 보수'의 면모도 찾을 수 있었다. 

금배지 이후 달라진 삶
  
그렇다면, 그는 왜 최근 몇 년 사이 구설수에 자주 오르고 욕을 많이 먹게 된 걸까. 그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39년간 공적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공적활동의 장으로 나온 뒤, 그는 세 차례의 대격변을 겪었다. 1980년, 박정희의 구군부에 뒤이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면서 군부독재를 연장하는 기로에서 판사가 된 것.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사법부 독립성이 강화되는 가운데 판사 생활을 계속한 것. 변호사 개업 후 그리고 2016년부터 몰락한 보수세력의 일원으로 의정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것.

'1980년 이후' 및 '1987년 이후' 두 시기에 그는 '힘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1980년에 석달윤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그가 군사정권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판사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그는 '유능한 판사'라는 평을 들으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1987년 이후의 시국사건에서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기는 발언을 한 것은 민주화 이후 실정법과 시대정신 두 가지 기류를 절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중의 힘이 강해지는 가운데서도 정권은 여전히 보수정당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2016년 촛불혁명 이후로는 뭔가 '삐걱'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듯하다. 판단을 그르쳐 오점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2017년 1월엔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며 바른정당에 들어갔다가 5개월 만에 도로 나왔다. 또 말실수나 욕설로 스스로 평판을 깎아먹고 있다.

여상규 의원은 자신의 39년 법조인 인생이 최근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사법개혁이 이슈인 정국에서 국회법사위원장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우선 '막말'부터 단속하는 게 급선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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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위원장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에서 열린 검찰국정감사에서 눈을 감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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