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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대선에서 70% 득표한 지역을 아십니까

[대구 완전 학습] 대구에서 보는 민주화 운동 유적

등록 2019.10.21 10:48수정 2019.10.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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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2.2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문 기사 (앞의 두 기념비) 경북고와 대구고 교정의 기념비 ⓒ 정만진

 
1946년 10월 대구시민 20만 명 중 1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현재로 환산하면 245만 중 12만 명이 '폭도'(<대구시사> 보도 내용)로 나선 것이다.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하면 10명 중 1명이 '폭도'였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결과는 선거 때 득표율로 나타났다. 1952년 첫 직선 대통령 선거 때 조봉암은 대구에서 23%를 득표했다. 조봉암이 전국 평균 11%(이승만 75%), 서울에서 10%, 전남(광주 포함)에서 9% 득표한 선거였다. 

1956년 대선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대구 시민들은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이승만에게는 27%에 불과한 표를 던졌다. 당시 조봉암은 서울에서 37%, 전남에서 28% 득표했다. 전국 평균은 조봉암 30%, 이승만 70%였다.

조봉암에게 70% 투표했던 대구
 
대선 이후 정적 살해
3대 대선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1959년 7월 31일 사형시켰다.

7대 대선 이후인 1973년 8월 8일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대중은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동해에 수장될 위기에 직면했다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봉암이 죽음을 맞이한 것과 마찬가지 성격의 이 사건에 세계가 주목했고, 덕분에 김대중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63년 대선의 전국 득표율은 박정희 47%, 윤보선 45%였다. 대구는 박정희 51%, 윤보선 44%였다. 서울은 박정희 30%, 윤보선 65%였고, 전남은 박정희 57%, 윤보선 36%였다. 이때만 해도 이른바 '망국적 지역감정'에 따른 선거는 아니었다. 

1963년 대선 때 7%에 지나지 않던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구 득표율 차이가 1967년 대선에서는 45%p로 돌변했다(전국 차이는 약 10.5%p). 1971년 대선 때도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구 차이는 40%p에 이르렀다(전국 차이는 약 7.9%p). 대구의 투표 성향 급변이 박정희 일파의 지역감정 조장 결과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대구의 돌변은 빅정희의 재선 때부터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낙선인'의 대구 득표율은 31.8%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 지난 1997년은 전혀 달랐다. 김대중 '당선인' 12.5%, 권영길 1.2%, 합계 13.7%에 불과했다. 

2002년에는 노무현 '당선인' 18.7%, 권영길 3.3%, 합계 22.0%였다. 2017년 문재인 '당선인'은 21.8%를 득표했다. 1997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두 번 모두 1971년 김대중 '낙선인'의 31.8%에 견주면 차이가 컸다.

박정희 일파의 지역감정 조장 이래 시작된 '묻지마' 투표 행위는 3당 합당 이후 심화됐다. 1987년 대선 때 대구 지역 득표율은 노태우 70.7%, 김영삼 24.3%, 김대중 1.7%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합계 26.0%는 1971년 김대중의 31.8%보다 5.8%p 낮지만 2002년과 2017년 민주화 세력의 득표율에 비하면 4%p가량 높다. 1987년 김영삼 지지자 중 1/6 정도가 민주화 세력을 영원히 이탈한 것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2.2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적은 게시물을 통해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고, '당시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졌고, 19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다.'면서 '세계사의 변혁에도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 대구근대역사관


현재 대구는 과거 비민주화 성향을 보여왔던 보수 세력, 대략 자유한국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지역으로 굳어 있다. 하지만 대구는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 지역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의 1960년 2월 28일 관련 게시물을 읽어보자.

"2.28민주운동은 자유당 정권의 불법적인 인권유린과 빈곤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국민적 요구에 불을 당겼다. 그것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제1공화국의 붕괴를 이끌어냈다.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 것이다.

(2.28민주운동은) 당시 이와(우리나라와)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도 희망의 빛을 던졌고, 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다. 2.28민주운동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역사상 처음 체험적으로 깨닫게 했고, 세계사의 변혁에도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2.28 답사지로는 2.28민주운동기념회관(중구 2.28길 9), 두류공원의 2.28기념탑, 경북고 교정의 기념비, 대구고 교정의 기념비가 있다. 동구 아양로41길 56의 2.28학생도서관 내부에도 2.28 관련 전시물들이 게시돼 있다. 또 동성로2길 80의 2.28기념중앙공원에는 김윤식 시인이 '2.28 대구 학생 데모를 보고'라는 부제를 붙여 1960년 2월 28일에 발표한 시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 시비가 있다. 
 

대구 2.28기념관 ⓒ 정만진

   
대구에는 2.28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전반에 관한 자료와 사진을 보여주는 기념관도 있다. 대구 시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이곳은 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이사장 서훈)가 관리 중인 왕년의 신민당 대구시당 건물이다.

중구 중앙대로 348 소재의 이 건물은 현재 '민주화운동기념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건물 도로쪽 외벽을 '그때 그 시절 정치 현장'이라는 제목 아래 1982년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사진, 1984~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군부 독재 타도 시위 사진, 1979년 YH여공 김경숙 양 사망 규탄 대회 사진, 1974년 괴한들이 야당 김영삼 총재를 호텔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감금하고 있는 사진 등으로 장식하고 있어 행인들의 이목을 끄는 곳이다.

대구 민주화운동 기념관, 꼭 가볼 만한 곳

본격적인 전시장은 건물 2층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잔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한국 정국의 흐름(정당 계보 및 개념도)' 게시물이 방문자를 경탄하게 만든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연대별 해설과 사진을 보노라면 이 공간을 꾸민 이들의 정성이 저절로 헤아려진다.

게시물을 모두 이 지면에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직접 가서 생생하게 보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백문불여일견이니 한 번 답사를 해 보길 권한다. 대구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보람을 맛볼 수 있는 하루가 될 것이다.

 

도로변 벽에 '그때 그 시절 정치 현장'이라는 제목 아래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들을 게시히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관'(대구 중구 중앙대로 348)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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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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