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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월-765번의 만남... 그제서야 이뤄진 '정전협정'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41] 1953년 7~9월의 전란 현장

등록 2019.12.11 15:18수정 2019.12.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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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회담 조인식, 미군 측 해리슨 제독과 북측의 남일 대장이 쌍방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1953. 7. 27.). ⓒ NARA

 
정전회담 체결

1953년 7월 27일 10시 정각, 마침내 정전회담장 동쪽 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과 실무자가,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해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정전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를 나란히 배치해 뒀다. 세 개의 탁자 중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 탁자에 앉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기 서른여섯 번씩 서명을 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가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는 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간 서명이 끝냈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 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뤄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00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명이었다. 한국인 기자석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한국인 참여 없이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날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유엔군 전폭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동해바다에서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정전 직전 최후 순간까지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1953년 7월 27일 22시, 그제야 정전협정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155마일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3년 1개월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서로 승자라고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 동안 양측 사상자는 민간인 포함 약 500만 명 그리고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전쟁 전 일직선 38선 대신에 곡선의 휴전선으로,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휴전선을 남겼다.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침체기의 경제를 부흥시킴과 아울러 서방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고, 일본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할 만큼 태평양전쟁 패전국의 잿더미를 재건시키는 데 그 원동력이 됐다.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를 더욱 공고히 굳혔고, 남한 역시 흔들리던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큰 몫을 했다.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힘없는 백성들만 소련제, 미국제 무기를 들고 내 핏줄, 내 형제들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무참히 죽이는 강대국의
땅따먹기 노름에 놀아난,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가엽고도 불쌍한 어릿광대 꼴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완전히 끝난 평화협정이 아니라, 잠시 쉬는 정전협정으로 한반도는 어정쩡한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지금까지 계속 남아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치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이번 회는 1953년 7~9월의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으로 엮었다.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1953. 7. 25.). ⓒ NARA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국전쟁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1953. 7. 26.). ⓒ NARA

   

북한 군인들이 정전회담 조인식을 지켜보고 있다(1953. 7. 27.). ⓒ NARA

   

북송을 원하는 공산 포로들을 인천에서 판문점행 열차에 태우고 있다(1953. 8. 5.). ⓒ NARA

   

공산군 포로들이 판문점으로 가기 위해 트럭에 오르는 장면임. 그들은 인천에서부터 여기까진 열차로 왔음. 이때까진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판문점 가까이 도착하자 그들은 공산주의 표어와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1953. 8. 5.). ⓒ NARA

   

북송을 원하는 공산군 포로들이 판문점으로 가는 열차에 타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1953. 8. 5.). -James H. Eveland 하사 촬영. ⓒ NARA

   

판문점, 한국군 고위층과 국회의원들이 북한에 억류된 포로들의 송환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다(1953. 8. 16.). ⓒ NARA

   

정전회담 중립국 측 대표( 1953. 9. 21. ). ⓒ NARA

   

판문점 정전회담장의 중립국감시단의 원탁회의 장면(체코, 스웨덴, 폴란드, 스위스 대표 등)(1953. 9. 21.). ⓒ NARA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의 NARA 앨범]은 45회로 끝납니다.
#NARA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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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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