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7 08:37최종 업데이트 19.09.17 10:18
날카로운 통찰과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2030 칼럼 '해시태그 #청년'이 매주 화요일 <오마이뉴스> 독자를 찾아갑니다.[편집자말]
"언니네 집안에 한을 품은 귀신이 있네. 엄마 쪽에 말이야. 그 언니의 한을 풀어줘야 해." 

신년 운세를 보러 갔다가 무속인에게 한을 풀라는 말을 들었다. 이전에도 다른 점집에서 몇 번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점집의 단골 멘트인가 싶어 한 귀로 흘려듣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바로 '그 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골 할머니 집은 'ㄷ'자 모양으로 생겼다. 한 직선에는 화장실, 부엌, 안방이 있고, 가운데 직선에는 마루와 방 두 개, 나머지 직선에는 사랑채가 있다. 명절 때 할머니 집에 가면 우리 가족은 주로 가운데 직선의 끝 방에서 머물렀다. 우리가 머물던 방 바로 옆에는 비밀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대체로 문이 잠겨 있었는데, 가끔 호기심에 문틈으로 안을 보면 온갖 짐 더미와 어둠이 가득했다. 어른들은 쥐덫을 설치했으니 그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밝고 복작복작한 집 안에 외딴 섬처럼 떨어진 낯선 방. 어두움이나 쥐보다 나를 떨게 만든 건 희미하게 기억하는 어떤 이야기였다. "옛날에 거기에서 목매달고 자살한 사람이 있대." 언젠가 친척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은 사촌이 들려준 말이다. 그 뒤로 그 방을 지나칠 때마다 어둠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를 의식하며 애써 담담한 척 걸음을 옮겼다. 방의 비밀을 확인하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어느 여름, 할머니 집 마루에서 엄마와 옥수수를 먹다가 불쑥 물었다. "엄마, 이 집에서 누가 자살한 적 있어?" 엄마는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입을 뗐다. "있었지. 혜자(가명) 언니, 좋은 언니였는데……."

딸들의 삶
 

혜자 이모의 방은 금기시되었다 ⓒ pixabay


엄마는 육남매 중 막내다. 그런데 사실은 육남매가 아니라 칠남매였다고 한다. 엄마에게는 언니가 한 명 더 있었다. 엄마의 첫마디는 언니가 무척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옛날, 엄마의 착한 혜자 언니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 언니는 결혼을 서둘러 달라고 부모님에게 부탁했지만, 부모님은 오빠들이 결혼하기 전에 먼저 시집가서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방에서 목매단 채 죽은 언니를 발견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날 이후 엄마에게도 그 방은 출입금지의 방이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혜자 언니의 죽음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혜자 언니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내가 묻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무 살 무렵, 나는 정말 그 방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를 섬뜩하게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모였다니.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할머니 집에 잠시 머물다 도시로 떠났고, 혜자 이모의 이야기도 잠시 나에게 머물다 떠났다. 80년대 여성에게 혼전 임신이란 어떤 무게였을지, 이모에게 임신중절수술이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 무엇이 이모를 죽음으로 떠밀었는지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 시대, 그 방과 물리적으로 떨어진 나는 쉽게 그 방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막내딸이었던 엄마는 무럭무럭 자라 스무 살에 한 군인을 만나 시집을 갔다. 한 번 몸을 준 남자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던 엄마는 아빠에게 '몸을 준' 밤 이후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한 해에 내가 태어났고, 2년 뒤 동생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아이를 낳을 때 어땠냐고 묻곤 했고, 그럼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생생하게 그 순간을 들려줬다.

군인이었던 아빠가 부산에 있어서 엄마 혼자 외롭게 나를 낳았다는 이야기, 나를 낳고도 한 달 동안 아빠가 찾아오지 않자 놀란 외할아버지가 바람난 거 아니냐며 엄마와 나를 서둘러 부산까지 택시 태워 보냈다는 이야기, 둘째 승희를 낳을 때도 아빠는 곁에 없었다는 이야기, 함께 산부인과에 갔던 외할머니가 둘째도 딸이라는 걸 알고서 엄마를 두고 휙 돌아서 가버렸다는 이야기, 엄마는 갈비탕이 무척 먹고 싶었는데 가버린 자신의 엄마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는 이야기. 

여아 낙태가 빈번하게 이뤄졌던 88년, 90년에 우리 자매는 엄마의 설움을 먹고 태어났다. 용띠와 백말띠의 여자는 드세다고 임신중절수술이 '조장'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자연스레 '가족'에 포함되었다. 적어도 엄마가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혼 후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부터 엄마는 착한 막내딸이 아닌, 집안의 수치로 여겨졌다. 엄마의 자식인 나와 동생도 자연스레 가족에서 멀어졌다. 명절 풍경이 사라진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할머니 곁을 지키는 엄마에게 엄마의 큰 오빠는 당장 집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엄마는 싫다고, 오빠의 엄마지만 내 엄마기도 하다고 저항했다. 한 번은 큰오빠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할머니의 병문안을 온 적이 있다. 그때 병실에서 엄마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큰 오빠가 엄마를 뒤로 쏙 빼고 이모만을 '미국에서 온 권사'라고 목사에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엄마는 남매들이 만든 가족 밴드에서 나왔다. 엄마가 나온 건지, 밀려난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방에는 누가 있습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겉표지 ⓒ Lightning Source Inc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도 '그 방'이 존재한다. 울프는 이름 모르는 존재에 이름을 붙인다. 셰익스피어의 누이, 셰익스피어만큼 재능 있는 사람, 임시 이름은 주디스. 울프는 상상한다. 만약 주디스가 셰익스피어처럼 문법학교에 다니면서 문법과 논리학, 라틴어를 배우고,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고, 주어진 세계에서 이탈해 런던으로 떠나 그곳에서 연극 생활을 시작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각종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면, 내면에 있는 재능을 키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어땠을까.

주디스도 셰익스피어처럼 선술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한밤중에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연극 무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왜 그녀는 이른 나이에 죽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교차로에 조용히 묻혀야 했는지, 왜 마녀, 악마에 사로잡힌 여자로 사라져야 했는지, 왜 스스로 말하지 못했는지 묻는다. 울프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주디스'를 부른다.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주디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입니다."(164p) 

울프는 '주디스'를 기억하고 나는 '그 방'과 혜자 이모를 기억한다. 내가 혜자 이모를 기억하는 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한, 삐걱거리는 경험을 공유한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화목하고 밝은 집안에 자리한 이질적인 방, 누가 열어보지 못하도록 꼭 잠겨 있던 방,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죽음이 잠든 방. 그 방에는 혜자 이모가 있고, 주디스가 있고, 엄마가 있다. 조용히 사라진 존재들이 잠들어 있다.

나에게 가족은 애도의 공동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 시설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이모의 존재를 기억하는 A, IMF로 가계가 휘청거리자 모든 형제들이 등 돌려서 상처받은 B의 부모님, 혼전 임신으로 자살하고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까지 금기로 여겨진 혜자 이모와, 이혼 이후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족에서 밀려난 엄마를 떠올린다. 궁금하다. 당신의 가족은 어떤 '그것'을 배제하고 화목함을 연기할 수 있는지.

나는 어릴 때부터 부동산이나 돈을 소재로 하는 가족들의 지루한 대화보다 그 방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중력처럼 나를 끌어당기던 이야기들. '그것'이 잠든 방 중에 나와 무관한 방이 있을까. 우리와 무관한 방이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방에 머물며 조용히 사라진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