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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부리다 살인마에게 쫓기게 된 남자... 더욱 무서운건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 하비에르 바르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19.09.11 17:54최종업데이트19.09.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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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포스터 ⓒ 해리슨앤컴퍼니

 
어느 날 우연히 거액의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발견하는 상상, 다들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목격자는 없고, 가방에 들어있는 돈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거액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상상일 뿐이지만(게다가 실제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우리의 선택은 상상과 다를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은 그 자체로 우리를 윤리의 심판대에 세운다. 그리고 어느 선택을 하든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1980년, 멕시코와 국경 지대에 있는 텍사스의 어느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총격전으로 끝난 마약 거래 현장을 발견한다. 갈증을 호소하며 죽어가는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죽어버린 현장에서 모스는 200만 달러가 들어있는 돈 가방과 트럭 짐칸을 가득 채운 마약을 보고, 돈 가방을 챙겨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트레일러로 돌아온다.

죽어가던 남자를 홀로 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스는 늦은 밤, 물병을 들고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데 현장에는 마약 카르텔 조직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이미 도착해 사라진 돈 가방을 찾고 있다. 모스의 존재는 금세 이들에게 들켜 버리고, 가까스로 이들을 피한 모스는 아내 칼라(켈리 맥도날드)를 친정으로 보낸 후, 그 역시 추적을 피해 도망간다. 자신을 쫓고 있는 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모스는 자신하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책임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살인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죽이고, 차를 훔치기 위해 죽이고, 자신의 신경에 거슬린다고 죽이는 그의 살인에는 잠깐의 망설임도, 갈등도, 고뇌도, 심지어 쾌락도 없다. '살인'이라는 명령이 입력된 로봇처럼 그의 살인은 정확하고, 차갑다. 그런 자가 모스를 쫓는다. 모스를 쫓는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 총이 아닌 산소통으로 한 번에 깔끔하게 고통 없이 생을 끝내는 게 그의 살인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살인마를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쫓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영화의 화자이기도 한 벨은 급변하는 세상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집안 대대로 보안관을 해오면서 여러 범죄자를 봐왔지만 그가 마주한 1980년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세상이다. 안톤 시거의 흔적을 쫓으면서 그는 더 큰 절망을 느낀다. 

미국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코맥 매카시가 쓴 동명의 작품(2005년 발간)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코엔 형제가 각색과 연출, 그리고 제작까지 맡았다.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최소한의 인물, 최소한의 대사, 최소한의 사건으로 인간 본연의 욕망, 그것이 야기하는 비극, 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까지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 미국 텍사스는 1970년대를 지나 온 미국 주류 사회(반전운동, 인권운동, 신자유주의 등등)와 동떨어져 시대를 상실한 외딴 곳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는 과거를 지나 온 시대의 파편들이 남긴 흔적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그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안톤 시거와 같은 인물을 마주했을 때 그 흔적은 생사를 결정 지을 만큼 크게 다가온다. 그렇게 마주한 현재는 당혹스럽다. 누구도 비극적이고 암울한 현재, 혹은 안톤 시거 같은 인물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별거 아니라고 치부했던 사소한 선택들이 모여 결국 지금의 나, 인생,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영화는 거듭 이야기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영화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죽이겠다고 증언한 소년 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는 벨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경찰에게 체포된 안톤 시거가 수갑을 차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도 차분하게 경찰을 살해하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바닥에 쓰러져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인 경찰이 남긴 흔적, 바닥에 구두 굽이 밀리며 남긴 수백 번의 발길질은 안톤 시거의 단순명료하고, 그 어떤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행위와 대조되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이제 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그는 이전까지 우리가 보아온 악역들과 다르다. 모스가 훔쳐간 돈 가방을 그가 쫓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서 돈과 마약에 대한 탐욕을 읽을 수는 없다. 살인에서 쾌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는 그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제거한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의 존재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행동만이 그를 설명할 뿐, 그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주는 공포를 실감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스릴러 이상의 긴장감과 작품의 무거운 주제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톤이 악(惡)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괴물'이라면 보안관 벨은 보통의 선(善)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통 받는 인물, 관객이 자신을 대입하기에 가장 쉬운, 모스가 있다. 베트남 전에도 참전했던 모스는 훔친 200만 달러를 지키기 위해 살인도 기꺼이 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가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기 때문에 살인도 마다 않는 걸까? 아니다.

그는 돈과 마약을 향한 탐욕이 낳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그가 돈 가방을 주운 장소를 생각해보라!) 자신을 과신('나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야.')하며 거기에 빠져드는 보통의 사람이다. 돈 가방에 손을 댄 그 순간부터 그의 욕망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모두 버리고 포기했어야 할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달려가고, 탐욕의 저승사자가 그를 뒤쫓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안톤 시거 역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스페인 출신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보여준 섬뜩한 연기는 전에 본적 없는 새로운 악역을 탄생시켰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단발머리는 차분하고 과묵한 행동과 어우러져 기괴한 공포심을 자극하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과 말투는 엄청난 카리스마로 상대역은 물론이고 관객까지 압도한다. 

1980년대에 TV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1990년대 들어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 2000년 줄리앙 슈나벨 감독이 연출한 <비포 나잇 폴스>로 미국 영화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국제적인 명성 또한 얻었다. <씨 인사이드>(2004)에서의 놀라운 연기로 평단은 물론이고 영화를 본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국내 관객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가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된 것은 2007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서다. 그의 연기에 충격을 받은 관객들인 이 놀라운 배우가 <씨 인사이드>의 그 배우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연기 잘하는 배우를 넘어서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우디 알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리들리 스콧, 테렌스 맬릭 등 이후 그가 함께 한 감독들의 이름만 봐도 배우로서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연기를 보다 다양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관객이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이다. 

지난 8월 개봉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누구나 아는 비밀>에서 역시 그는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함께한 <듄>, 샐리 포터 감독의 <몰리>가 2020년 개봉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감은 계속해서 유지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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