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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가 아닌, '운동가 김복동'의 이야기

[리뷰] 우리가 기억해야할 그 이름, 영화 <김복동>

19.08.15 19:30최종업데이트19.08.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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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동>(2019) 포스터 ⓒ 뉴스타파


"김복동 운동가는 왜 할머니로 불리는 걸까요? 돌아가시는 날까지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운 분인데 말이죠."

김복동 운동가의 영면 소식이 있고 지역사회에서 그의 빈소를 마련했다. 그 빈소를 지키던 활동가가 회한에 찬 어조로 했던 말이다. 동감한다. 사람은 마땅히 그가 걸어온 궤적에 걸맞은 호칭으로 불려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5년 오키나와의 배봉기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스스로의 의지로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오키나와에서 무국적 상태로 살아온 그가 노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보조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배봉기는 '아웃팅'된 상황이었다.

그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졌음에도 언론에서는 슬쩍 알리는 시늉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그를 돌보아 준 사람들이 조선총련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배봉기의 존재는 국가폭력, 식민지주의, 남북분단이 중첩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려주는 상징성을 갖는다." -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이후 1991년 고 김학순 운동가의 증언을 시작으로 국내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듬해 고 김복동 운동가의 증언이 있었다. 부산에서 억척같이 살며 과거의 상처를 묻었다고 생각했던 김복동은, 김학순의 증언을 듣자 묻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고통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던 걸까?
 

다큐멘터리 <김복동> 장면 ⓒ (주)엣나인필름

 
영화 <김복동>은 김복동 운동가의 신념에 관한 영화다. 광복이 되었어도 '쨍하고 볕들 날'을 보지 못한 채, 평생 음지에서 살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피해자를 기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김복동>에 앞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들이 있다. <귀향> <눈길>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 등이다. 이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나는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잘 모르고 있었구나.' 작가 김숨이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과 길원옥의 증언집을 쓰면서, 할머니들의 얘기를 충분히 알고 있고 그 아픔을 절실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처럼.
 
'위안부'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김복동은 평생 남편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일은 어떤 일일까. 김학순의 증언 이후, 자신의 피해 사실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김복동은 언니와 의논하지만, 언니는 강하게 만류한다. 하지만 그는 해야만 했고 했다. 증언 이후 그는 언니와 조카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가장 가깝다고 여긴 가족에게 가장 먼저 버림받았다.
 
가족에게 버려지면서 감행한 증언이니, 어떻게든 내놓을 만한 결실이 있어야만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된 김복동은 모든 활동을 접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며 한동안 술과 담배에 기댄다. 그러다 80이 넘은 나이에, 노구의 몸을 다시 분연히 일으켜 세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복동 선생은 생전 미국·유럽·일본 등 전세계를 순회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렸다. ⓒ <뉴스타파>

 
다시 싸우기 위해 서울로 돌아온 김복동의 행보는 여느 젊은이도 혀를 내두를 노익장을 보여준다. 몇 해 전 '수요집회'에서 보았던 그 짱짱했던 김복동 운동가는 처음부터 그런 결기를 탑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기력으로 무너졌던 사람이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다시는 나 같은 여성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이 신념이 그를 운동가로 거듭나게 했다.

인간은 본디 약하디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이런 인간을 차돌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건, 다쳐도 쓰러져도 물러서지 않게 하는 건,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자성을 넘어설 때, 기적처럼 일어난다. 내가 왜 어째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나를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성장시켜 상상하지도 못할 용기를 내게 한다. 나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숭고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복동은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어갔거나, 살았어도 사람답게 살지 못한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뼈저리게 함께 하고자 했을 것이다. <항거>에서 유관순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이 일을 지금 여기서 내가 하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하나요?"
 
김복동은 젊은이들을 아꼈다. '평화나비'의 젊은 활동가들을 보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진다. 살날이 많지 않은 자신이 미처 끝내지 못할 일을 오직 젊은이들만이 완수해주리라 믿기 때문일까? 그는 줄곧 부탁한다. "끝까지 싸워주세요."
 
병마가 덮친 노구를 이끌고 재일본조선인학교를 찾은 김복동의 눈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자신을 평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일제의 땅에서, 눈만 뜨면 조센징 혐오가 살기등등한 그곳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젊은이들에게 어찌 뜨거운 연민과 연대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복동 운동가가 미국 소녀상 제막식에, 소녀상의 소녀의 옷과 같은 흰 저고리에 무릎을 넘기는 검은 통치마를 입은 모습은 처연하다. 이제 다른 세상으로 떠난 그곳에선 부디 '나비'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영화의 엔딩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길원옥을 비춘다. "잊어버리는 약을 먹은 걸까"라는 그는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이 속절없다. 그가 단짝이었던 김복동을 잊고 자신마저 잊는다 해도, 그리고 언젠가 그마저 덧없는 세상을 떠난다 해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기림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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