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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기록된 고 김복동 선생의 희망, 그 불굴의 의지

[김유경의 영화만평] 나는 그를 '광김복동'이라 부르련다

19.08.15 17:02최종업데이트19.08.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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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동> 스틸컷 ⓒ 엣나인필름

  
어제는 8월 14일이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나는 영화 <김복동> 상영관을 찾는다. 걸어갈 수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 둘 중 한 곳은 그제로 상영이 끝난 상태다. 마지못해 승낙한 듯 딱 7일만 영사기를 돌린 거다. 다른 한 곳은 8월 16일까지 1일 1회 상영한다.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라는 기사와 어긋난다.

고인이 된 김복동(金福童)은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다. 영화는 그 정체성이 뚜렷한 27년간의 행적에 앵글을 맞춘다. 초기 화면은 정갈한 그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비추며 관객을 잡아당긴다. 가까운 피붙이조차 입에 올리기 꺼리는 그의 과거사가 만 14세 소녀의 자발성과는 거리 먼 재난의 역사였음을 재차 역설하는 양.
 
올 1월, 94세로 눈감을 때까지 김복동은 끊임없이 길로 나선다. 연골이 무너져 내린 척추는 진통제가 절실한데도. 그의 유일한 무기는 "입은 살아있으니까"다. 아베 정부에게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지만, 사과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그가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나가고,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하고, 나비기금을 만들고, 김복동 장학금을 주고, 세계 순회 증언 등을 계속하는 건 순전히 희망 때문이다.
 

영화 <김복동> 스틸컷 ⓒ 엣나인필름

 
'김복동의 희망'은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에 기초한 불굴의 의지 표명이다. 원하는 걸 애써서 당당히 얻겠다는 미래지향성이다. 그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피해의식을 떨치고 세계평화로 내딛는 연대의식의 성숙함이다. 지난 7월 안산 상록수역 광장에 세워진 소녀상을 훼손한 청년 넷을 "앞날이 창창하다"며 용서한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너른 품이 그 좋은 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이다. 식민지 땅에 볕든 날, 즉 주권을 회복한 날이다. 영화는 김복동 생전에 진정한 광복절이 대한민국에 도래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자국민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보다 아베 정부를 배려해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부산시가, 2015년 불가역적인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몰래 성사시킨 박근혜 정부의 주역들이 생생하게 돋아난 화면이 그 증거다.
 

영화 <김복동> 스틸컷 ⓒ 엣나인필름

 
최근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빼며 아베 정부가 보인 일련의 무례함은, 한국을 일본의 하위국가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 거다.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아베 정부가 깨닫고 주제파악을 재정립할 때,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명실상부한 광복을 이룰 수 있다. 그걸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노 재팬'운동은 '김복동의 희망'과 같다.
 
나는 그를 광김복동이라 부르련다. 광김복동은 볕든 김복동이다. 어제 '기림의 날' 울려 퍼진 뭇 평화나비의 염원도 광김복동이리라. 영화 <김복동>이 내게 속삭인다. 일정 기간 국가(민) 차원의 힘든 과정을 거치겠지만, 아베 정부가 벌인 굿판에서 '김복동의 희망'을 꽉 부여잡고 이겨내자고. 끝내 아베 정부를 무릎 꿇려 한국 주도로 세계질서를 재편하자고.
 
덧붙이는 글 https://brunch.co.kr/@newcritic21/20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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