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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하는 척 일본군 유인... 실제 '봉오동 전투'는 이랬다

[리뷰] 영화 <봉오동 전투>...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의 승전

19.08.11 19:00최종업데이트19.08.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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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적지 일대를 껴안고 있는 초모정자산(2004년 제2차 답사 때 촬영). ⓒ 박도

 
최초 승첩지
 
'봉오동'은 중국 지린성 두만강변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1920년 6월,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 마을 계곡에서 일본 정규군 월강추격대대를 유인하여 크게 싸워 이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승첩지(勝捷地)이기도 하다. 나는 영화 <봉오동 전투>를 감상하면서 상영 내내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견주면서 주의 깊게 살폈다.
 
그 까닭은 나는 봉오동 전적지를 두 차례나 아주 꼼꼼히 답사했기 때문이다. 제1차 답사는 1999년 8월 5일, 독립운동가 후손 이항증(이상룡 임시정부 국무령 증손자), 김중생(백서농장 장주 김동삼 손자) 선생의 안내로 가능했다. 거기서 장엄하고도 장쾌한 봉오동 전투와 그 역사적 사실에 크게 감동을 받은 바 있었다.
 
제2차 답사는 2004년 6월 1일, 안동MBC 기획 <혁신 유림>이라는 프로그램 특별취재 팀 안내자로 그곳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때 현지 사학자 연변대학교 김태국 교수의 알뜰한 답사로 제1차 때 미처 보지 못한 봉오동 전적지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독자들에게 역사적 사실(팩트)을 알려드리는 게 한 기록자로서 임무일 것 같아 이 기사를 쓴다.
 

중국 지린성 두만강변 봉오동 어귀 계곡으로 지금은 봉오동 저수지로 변해 있었다(2004년 제2차 답사 때 촬영). ⓒ 박도

  
봉오동전투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 지린성 화룡현 삼둔자(三屯子)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날 새벽 30여 명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넌 뒤 함북 종성 강양동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본대가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조선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 민간인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산기슭 범진령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섬멸시켰다. 이에 함북 종성군 나남 주둔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했다.
 
이 월강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대장이었다. 그들은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교전에 앞서 봉오동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켰다. 그런 뒤 우리 독립군을 봉오동 상촌 험준한 고지에 분산 매복케 했다. 그런 다음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해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 ⓒ 쇼박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 일본군 월강추격대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어귀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월강추격대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쳤다. 그들은 봉오동 어귀마을인 하촌을 정찰한 결과, 조선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대 본대를 불러서 하촌 마을을 샅샅이 뒤지면서 미처 대피치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뒤 월강추격대대는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봉오동 중촌, 상촌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월강추격대대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촌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우리 독립군 포위망 속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들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상촌 골짜기 깊숙이 우리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그물망 속 고기처럼 몰려 들었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우리 독립군에게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의 총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월강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 계곡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더욱 늘어났다.
 
그들은 그제야 더 이상 전투는 무모함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대를 더욱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대승첩이었다.
 

봉오동 전적지 기념비(1999년 제1차 답사 때 촬영). ⓒ 박도

  
봉오동 전적비
 
봉오동전투 피해 규모에 관해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 자료인 당시 중국 〈상해시보〉는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당시 조선 독립군 연합부대는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의 대한국민군,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 혼성부대였다.

오늘의 봉오동 전적비는 봉오동저수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 아래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우리 답사단 일행은 한국에서 준비해 간 소주를 전적비 제단에다 드린 후, 엎드려 큰절을 하고 남은 술은 전적비 언저리에다 뿌렸다. 
 
영화는 관객에게 흥미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실제로 없었던 것을 보태어 사실인 것처럼 꾸미기 마련이다. 이를 각색이라고 한다. 나는 영화 <봉오동 전투> 개봉 이튿날 원주의 한 영화관에서 감상한 뒤 열연한 배우들과 최선을 다한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냈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 ⓒ 쇼박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장세윤 지음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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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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