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된 한일관계, 미국은 도와줄 수 있을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2019년 국제정세가 구한말과 꼭 같진 않지만...

등록 2019.07.29 09:57수정 2019.07.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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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6일 G20정상회의가 열렸던 독일 함부르크 시내 미국총영사관에서 진행된 한미일 정상만찬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지금의 한국 정세를 구한말에 비유하는 목소리가 많다. 물론 한국의 국력이나 세계질서 등을 놓고 보면, 구한말과 다른 점들이 많다. 남북이 분단돼 있다는 점도 다르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구한말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유사한 측면은 있다. 외세의 각축이 존재한다는 점이 그렇다. 일본은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고, 미국은 무역 문제나 주한미군 방위분담금 등을 놓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군용기 연합훈련 중 한국 영공과 방공식별구역을 각각 침범했다. 방공식별구역은 영공에 접근하는 비행물체의 식별과 통제 등을 위해 설정하는 구역이다. 영공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지금 전개되는 외세의 각축은 구한말에 비해 심각하지는 않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외세의 각축으로 위기에 봉착했다는 점에서는 지금이나 그때나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구한말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만하다.

조선을 망하게 한 두 가지 요소

그런데 구한말 상황을 거론할 때마다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조선 멸망의 원인을 지나치게 '외부'에서만 찾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문명 개화를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외교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들이 많다.

물론 외교도 중요했다. 그때 외교를 보다 잘했다면 양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최초의 시장개방이 이뤄진 1876년부터 조선이 멸망한 1910년까지를 살펴보면, 외교 못지않게 혹은 더 중요한 두 가지가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과 접하게 된다.

그중 한 가지는 조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계적 격동기였던 그때, 정부가 중심을 못 잡은 게 위기를 고조시키는 핵심 원인이 됐던 것이다.


1876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한 지 3년 뒤였다. 고종은 아버지와 정반대 전략을 표방했다. 외세를 끌어들여 그들끼리의 경쟁을 유도하면 외세가 힘을 잃게 돼 자주독립이 쉬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전략에 따라 고종은 1876년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고 1882년 청나라의 중재 하에 미국에 시장을 개방했다. 뒤이어 영국·독일·러시아 등에도 시장을 열어줬다.

그러나 상황은 고종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되레 그로 인해 초래된 것은 1882년부터 1894년까지의 내정간섭이었다.

청나라 중재 아래 서양과 국교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해지던 1882년, '임오군란'이라는 민중반란이 발생했다. 그러자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이 군대는 민란을 진압한 뒤 내정간섭 군대로 돌변했다.

이때부터 12년간 고종은 허수아비가 됐고, 청나라가 파견한 진수당(쳰슈탕)과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조선 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고종은 자주독립을 지키고 싶었지만, 내정간섭을 받는 상황에서 자기 뜻을 펴기는 힘들었다. 
 

베이징 자금성(쯔진청)에서 찍은 원세개. ⓒ 김종성

   
조선의 요청 거절한 미국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에 손을 내밀었지만, 소용 없었다. 2019년 7월 현재의 미국은 도와줄 듯이라도 행동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그렇지도 않았다.

미국은 양국관계의 격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응답했다. 1883년 5월 20일 부임한 초대 특명전권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1885년 2월 19일 이임한 뒤로, 미국은 두 번 다시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고종의 지원 요청에 대한 거절 의사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고종은 러시아로 손을 내밀었다. 러시아는 미국과 달리 호의적이었다. 청나라의 간섭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여줬다. 덕분에 러시아와 비밀동맹도 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동맹이 들통나는 바람에 1886년 고종은 왕권을 잃을 뻔했다. 원세개가 고종 폐위를 추진하다가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중단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중심축을 잃은 고종은 애초의 계획을 소신껏 추진할 수 없었다. 러시아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선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는 일본의 간섭을 받았다. 1894년 연초에 발생한 동학혁명을 진압하고자 청나라군에 파병을 요청했더니, 청나라군뿐 아니라 일본군까지 덩달아 출동했다. 조선에 주둔한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결과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났다. 조선에 대한 간섭권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일본은 개혁이란 미명 하에 내정간섭을 실시했다. 자국의 침투에 용이한 방향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다. 갑오경장(갑오개혁)이 바로 그것이다. 청나라는 고종을 폐위하려다가 그만뒀지만, 일본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자, 일본은 보복 차원에서 명성황후 민씨 시해를 단행했다(1895년 을미사변). 이 시기에도 고종은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1896년에는 새로운 상황이 등장했다. 어느 한 나라도 조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종의 모험이 낳은 결과였다.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다 번번이 실패한 고종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의외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빠져나와 인근의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몸을 옮긴 것이다(아관파천).

러시아에 손 내민 고종의 선택,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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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초상화. ⓒ 위키피디어백과사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진 가운데, 러시아가 조선 군주의 신병을 보호하는 상태. 이 구도 속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어느 쪽도 조선을 확실히 장악할 수 없었다. 이 틈을 타서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을 모색했다. 이로써 고종이 중심을 잡는 듯했지만, 이 상황은 얼마 가지 못했다. 독일이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1896년부터 러시아가 조선에 신경을 쓰는 틈을 놓치지 않은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1897년 11월 14일, 독일은 인천 서쪽의 청나라 산동(산둥)반도 일부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에 집중한 틈을 타서 산동반도로 영향력을 확장한 것이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는 1898년 3월 27일 산동반도 동북쪽이자 평양 서북쪽인 요동(랴오둥)반도의 여순(뤼순)과 대련(다롄)을 전격 점령했다. 독일의 서해 장악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독일이 산동반도를 기반으로 서해를 장악하면,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해진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부동항을 확보할 가능성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차단하고자 여순·대련을 점령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조선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다. 러시아는 조선에서 안정적으로 발을 뗄 목적으로 1898년 4월 26일 일본과 밀약을 체결했다. 로젠-니시 협약으로 불리는 이 밀약의 핵심은 '한반도는 일본이 갖고, 만주는 러시아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러시아가 고종을 버리고 갑자기 떠나게 되면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98년 중반부터 다시 일본의 단독 영향권에 놓이게 됐다. 이를 발판으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벌여 러시아가 만주에서도 발을 떼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 같은 일본의 강공책에 고종은 별다른 제동을 걸지 못했다. 자기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점 외에, 상황을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백성들의 역량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1894년에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고 1898년에 독립협회를 진압했다. 두 조직의 공통점은 만민평등과 정치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고 타협 대신 탄압을 택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다. ⓒ 김종성

  
이는 서민층이 정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898년 독립협회 진압 이후 조선 정부가 외로운 싸움을 했던 이유를 여기서 찾아낼 수 있다. 선비층이 중심이 된 의병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심마저 나라를 떠났으니. 일본의 침략이 그만큼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는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외세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 내정간섭을 자초했다. 그러면서도 민중의 정치참여 열기를 막는 데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나라를 죽이는 힘은 밖에서 끌어들이고, 나라를 살리는 힘은 안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미국의 뜨뜻미지근한 태도, 이유는

일본·미국·러시아·중국 등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반도체 소재 등의 국산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미국을 움직여 일본을 제어하기 위한 외교전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을 상대하는 외교 활동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미국에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과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방미 활동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은 한국을 도울 의사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런 미국을 상대로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미국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중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서글프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미국이다. 미국 자신한테 위험한 일이라면, 한국이 굳이 알려주지 않더라도 미국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미국한테도 위험한 일이라면, 일본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전 양해를 구했을지 모른다. 

그런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면,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무역 문제나 방위비분담금 같은 현안에서 한국이 또 다른 곤경에 빠질 가능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은 외롭고 급하다고 여겨 남의 손을 선뜻 끌어당기다가 중심을 잃고 화를 자초했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손을 잡고 제3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라면서 "이런 경우, 승리를 거둔다 해도 동맹국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라고 경고했다. 고종은 이이제이를 좋아하다가 결국 남의 손에 이끌려 중심을 잃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백성들마저 돕지 않으니, 쓰려져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깥'보다는 '안'이다. 물론 '바깥'을 향한 외교전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안'에 더 많은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강력한 힘이 우리 국민들 내부에서 형성되고 있다.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밖에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구한말의 조선은 그런 내부의 힘을 되레 위험시하고 바깥으로만 고개를 돌리다가 화를 당했다. 절대 밟지 말아야 할 전철이다.
#일본 경제보복 #한일 무역분쟁 #구한말 #고종 #러시아 영공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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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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