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02 21:21최종 업데이트 19.08.02 21:21
"쿵쿵쿵."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동무들 빨리 서두르시오." 조선로동당 충남도당위원장 남충렬(본명 박우헌)은 부하들을 재촉했다. 충남도당 사무실은 벌집을 쑤신 격이었다. 후퇴 짐을 싸랴, 소각할 문서와 가져갈 문서를 구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웬만하면 버리고 가시오"라는 상급간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당원들은 필수품만 챙기고 대둔산 초입의 충남 논산군 양촌면으로 집결했다.


충남도당이 유엔군을 피해 대둔산으로 집결한 때는 1950년 10월 초였다. 대전시당, 대덕군당, 논산군당, 부여군당, 천안군당에서 모여 들었다. 여기에는 로동당 당원들과 북한군 패잔병이 주된 대오를 형성했다. 하지만 논산군당 소속의 강경읍과 양촌면당은 인민위원회뿐만 아니라 민청, 여맹, 농민동맹원들까지 조직적으로 입산했다.

입산 초기 충남 빨치산은 약 1000명이었다. 그들은 대둔산 골짜기마다 참호를 구축하고, 발전기를 이용한 도정시설과 병원시설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막강한 대오를 형성했던 충남빨치산은 4년에 걸친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궤멸되었다. 400여 차례의 군·경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은 2287명이 사살되었고, 1025명이 붙잡혔다. 군경과 의용경찰, 우익단체원은 1376명이 전사했다. (송현강, '6·25 전쟁기 강경경찰서 및 대둔산지구 전투연구', 2012)

특히 초기에 있었던 대둔산 월성고지 전투는 힘겨웠다. 논산군 양촌면에 위치한 월성고지에는 100m 이상의 수직암벽이 있다. 경찰의 토벌과정에서 경찰 두 명이 바위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 명은 즉사했고, 중간에 소나무 가지에 걸린 이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놀뫼신문> 2019년 6월 19일자, "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이름 없이 죽은 삼남매 
 

대전형무소에서의 학살 한국전쟁 기간 대전형무소 내 온상 밭에서 학살된 시신들. ⓒ FADING AWAY, CHRISTOPHER HK LEE

 
대둔산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중에는 윤씨 삼남매가 있었다. 윤덕중(22세), 윤영중(19세), 윤경희(17세)가 그들이다.

충남 논산군 강경읍에 살았던 이들은 북한군이 강경을 점령하던 시절, 북한군을 도왔다. 약 70일간의 인공시절 북한군에 협력한 대가는 참혹했다. 이들의 막냇동생 윤석중(당시 9세) 증언에 의하면 "형님들과 누나가 대둔산으로 올라간 후 소식이 없어요. 토벌 과정에 죽은 것으로 들었어요"라고 한다.

윤씨 삼남매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대둔산으로 올라갔을까? "중공군이 참전하기 때문에 한 달만 버티면 된다"라는 북한군의 선전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이들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대둔산으로 올라갔다. 대한민국 군·경의 강압적인 '부역혐의자 검거'와 '처벌'이 두려워서였다. 

1950년 겨울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형무소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수감자로 폭발직전이었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950년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만 1만1992명이었다. 이들 중 주요가담자는 사형, 무기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지서나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1·4 후퇴시기에 서울, 대전 형무소 등지의 재소자들이 대구나 부산을 포함한 남부지역 형무소로 이감되면서 숱한 인권유린과 죽음(학살)을 당했다. 얼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고, 굶어 죽고, 압사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은 부산 초량역에서 내렸는데, 언젠가 한 번은 기차가 왔을 때 기차 안에서 죽은 사람이 350명 정도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부역혐의자들이 처한 조건은 공주형무소나 청주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군경이 수복한 후부터 1·4 후퇴 시기까지의 고초는 부역 혐의자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대전충남의 산악 인접지역 주민들은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 하에 각종 전쟁 범죄의 희생양이 됐다. 

1950년 12월 21일부터 1951년 1월 20일, 만 한 달간 대전형무소에서는 439명이 죽었다. 앞서 1950년 12월 서울의 부역혐의자 2020명이 대전형무소로 대량 이감되는 과정에 벌어진 참사였다. 대전으로 옮겨가는 동안 수감자들은 의약품, 식량, 침구의 미비로 병사, 아사, 동사했다.

거기다가 미군이 밤마다 강도와 강간을 일삼는 등 기겁할 일도 있었다. 최근 기자가 입수한 미8군 배속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보고서에는 이같은 민간인 피해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구술 증언과 일치한다. 보고서는 이렇게 적었다.
 
"이 지역 도지사 이씨(이영진)는 밤마다 강도와 강간이 대전시에서 일어나며, 이런 행위들은 미군(美軍)에 의해 범해지고 있다고 보고함. 이 정보는 519 헌병부대에 전달됨(The Governor of this Province Governor Lee reports that robbery and rape is nightly occurrence in the City of Taejon and, that these acts are being committed by US Army colored soldiers. This information was passed on to 519 MP Bn)" - WEEKLY ACTIVITIES REPORT, UNCACK, TAEJON TEAM, 22-28 January 1951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군 점령시절, 북한군에 협조한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강간과 강도를 피해 대둔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빨치산'으로 불렸으며, 군·경의 토벌과정에서 숱하게 죽었다. 
 

대전에서 밤마다 미군이 강도와 강간을 일삼았다는 유엔 보고서 ⓒ 박만순

   
정신분열, 행방불명... 전쟁이 망쳐놓은 삶

"보도연맹 회의가 있으니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강경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들은 세수를 하고 있던 윤한병(1900년생)을 연행했다. 세수하다 간 남편이 오지 않자, 아내 염순길은 강경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대전(산내)에서 죽었다"는 말이었다.

강경읍에서 '춘산한의원'을 경영하던 한의사 윤한병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평소 여운형과 호치민을 존경했던 그는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계기로 참여한 건국준비위원회 이력 때문에 후일 윤한병은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강경경찰서로 간 윤한병은 대전형무소에 옮겨졌다가 학살되고 만다.

윤한병의 남은 가족들은 피난 짐을 쌌다. 그들은 논산군 은진면 호량리로 피난을 갔지만 곧이은 북한군의 진주로 강경읍내로 돌아 왔다.

경복고와 광산전문학교를 나와 대전공업중학교(6년제) 교사를 하던 윤한병 장남 윤의중(1921년생)은 인공 시절 북한군의 호출을 받았다. 논산군 학무국에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후에 윤의중은 군경 수복 후 부역자로 검거돼 7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경찰서에서의 호된 고문과 열악한 형무소 환경은 건강하던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나왔다. 

석방 후에도 윤의중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생활은커녕 매일 방에서 누워 있는 신세였다. "특무대(CIC)가 전파 장치로 내 뇌를 조종하고 있다"라는 등의 헛소리를 했다. 툭하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석방된 지 6년만인 1964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윤한병의 둘째 아들 윤갑중(1924년생) 역시 전쟁 피해자다. 의용군으로 나간 그는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윤한병 집안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6명이 죽었다. 보도연맹원으로(아버지 윤한병), 부역혐의자(장남 윤의중)로, 빨치산으로 3명(자녀 윤덕중, 윤영중, 윤경희)이 죽었고, 한 명이 의용군(둘째 윤갑중)으로 행방불명됐다. 

생존자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려
 

증언자 윤석중 ⓒ 박만순

 
참혹한 가족사는 윤한병·염순길의 9남매 중 막내인 윤석중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평생을 사람을 멀리하게 하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때 내리 1등만 했던 그는 강경중학교를 나와 강경상고에 들어갔다. 300명 졸업에 10명만 은행에 입사하던 시절 농협에 합격했다. 이후 주택은행에 스카웃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근무했다. 강원도, 대구, 충무, 대전에서 지점장을 하고 1997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농협에 합격했을 때 신원조회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로 호적을 바꿨다. 매형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보니 직장 근무시절에는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 윤한병을 진실규명 신청했다. 하지만 대둔산에서 죽은 형 두 명과 누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전쟁의 옥쇄에서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역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비무장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닐까?

윤석중(78세,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은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비극에 대한 소감을 묻자, "노무현이 고맙지"라는 답변을 선뜻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과거사법이 제정되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되었다는 뜻이다.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를 썼던 그에게 노무현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윤석중의 형과 누나에게 '빨갱이' 굴레가 벗겨지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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