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의 기억'을 없던 셈 칠 수 없다는 일본 감독

[서평]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등록 2019.07.23 15:24수정 2019.07.23 15:24
0
원고료로 응원
더운 여름이다. 더운 여름의 강렬한 햇볕보다 더 강렬한 이슈가 한국을 달구고 있다. 어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보아도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피해를 걱정하며 일본의 정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인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나서고 일본 여행을 줄인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는 일관적으로 한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민족과 역사를 떼놓고는 말하기 쉽지 않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 침략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반면, 어떤 일본인들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 중에는 가해의 기억을 잊은 사람이 많으며, 일본사 자체도 가해의 기억은 없던 셈 치거나 대충 불문에 부친다'고 비판한 영화감독이 있다. 일본 사회가 참된 의미로 성숙한다면, 그때는 일본인이 자신의 손으로 의사와 긍지를 가지고 제9조(일본의 평화헌법 조항)를 다시 선택하고, 쇼와 천황(일왕)의 전쟁 책임까지 포함해 도쿄 전범 재판도 다시 열어 가해의 책임을 제대로 되물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을 포함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원더풀 라이프> 등의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사회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하다. 

일본인이 일본인을 보며 생각한 것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표지 ⓒ 바다출판사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영화감독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이 영상물을 찍으며 생각한 것을 정리한 글이다. 그는 원래 TV 방송 쪽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TV 다큐멘터리 제작사 티브이맨 유니언에 입사한 것이 직업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 학생들의 교육, 복지, 부라쿠민이나 재일 한국인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으면서 자신들의 풍요로운 생활이 어떤 가해의 역사 위에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인 등에게 부락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면 "어째서 알리려는 거야?", "부락의 존재 같은 건 잠자코 있으면 되잖아", "잠든 아이를 깨울 필요는 없잖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촬영하는 것과 전달하는 것의 의미, 아는 것과 알리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어쨌거나 '잠자코 있어도 없어지지 않는 차별'에 대해 말하자고 생각했습니다. - 101P
 
이 책에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들에게 느낀 것, 연기와 촬영에 대해 생각한 것 등을 정리한 글이 많다. 이런 글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도 눈을 부릅뜨고 읽을 만한 매우 날카로운 글도 있다. 특히 그가 다큐멘터리 작품을 제작하면서 쓴 글은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망각'에 대한 글이다.

이 책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사실을 회상하는 부분이 있다. 2005년에 그는 <시리즈 헌법>이라는 기획에 참여하며 '제9조 전쟁포기'를 주제로 선택, '망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는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헌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분노해 헌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전쟁과 고통에 대해 나름의 독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이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옛일을 잊어버리고 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피해자 의식이 국가적 수준에서도 국민적 수준에서도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제 어머니가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전쟁은 도쿄 대공습뿐이었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타이완과 한국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지금쯤은…" 하고 주눅 들지도 않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는 명백하게 피해 감정밖에 없습니다. (중략) 개인의 수준이 이러니 당연히 일본사 전체도 그런 형태를 취하겠지요. '가해의 기억'은 없던 셈 치거나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라고 정색하거나 불문에 부칩니다. - 152P
 
그는 일본의 평화헌법이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에 일종의 '쐐기'를 박은 것으로 봤다. 평화헌법은 전후를 살아가는 일본인이 항상 죄의식을 자각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며, 미국이 부여했다 하더라도 일본인에게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서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원죄'라는 것이다. 그는 도쿄 재판도 일본인의 힘으로 다시 열고, 가해자의 책임도 제대로 되물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

그는 TV가 공동체와 개인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TV 다큐멘터리 등의 작품이 시청자의 사고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한 글을 부드러운 문체로 정리한 책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개인적인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훌륭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오히려 영화보다 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흥미가 생겼다. 책 속 그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닌 한 명의 투사처럼 날카롭고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이 책은 훌륭한 영화를 찍은 명감독의 책이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자신이 만드는 작품에 피와 땀을 쏟아부은 기록이 있기 때문에 창작자에게도 권할 만한 책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창작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겠다. 한 사람의 일본인이 자신의 사회와 국가를 바라보며 고뇌한 시선이 명쾌하게 드러나 있는 책이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은이), 이지수 (옮긴이),
바다출판사, 2017


#고레에다히로카즈 #일본 #영화 #다큐멘터리 #촬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화해주실 일 있으신경우에 쪽지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