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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통해 본 우리가 공생을 하는 이유

[리뷰] 영화 <기생충>

19.06.25 16:53최종업데이트19.06.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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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1. 제목

<기생충>이란 제목만 보면, 상당히 단순하다. (인간사에서) 계급 차로 인해 서로 다른 집단끼리 기생한다는 뜻의 은유다. 기생하는 인간을 말 그대로 기생충에 비유한 것이다. 크게 새롭진 않다. 하지만 다수의 관심을 끌기에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것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다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화예술에서 반드시 노려야 하는 지점이다. 더불어 그가 가진 사회 현상에 대한 인식 또한, 다수의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게 된다.

감독은 '충'보단, '기'에 더 많은 집중을 하길 바랐다. 기(寄)는 '위임하다', '맡기다'라는 뜻의 한자어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는 삶, 혹은 맡겨야 하는 삶에 더 집중해주길 바란 걸지도 모른다. 기생과 공생의 범주까지 생각해보려 한다.

2. 기생
 
영화를 끌어가는 인물 간 구성은 간단하다. 많은 캐릭터는 필요 없이 딱 세 가족이 나온다. 기택(배우 송강호) 가족, 동익(배우 이선균) 가족, 문광(배우 이정은) 가족. 이 세 가족은 서로 다른 계급에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급이 정해졌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것일 수도 있다. 하늘에서 내린 계시처럼.

기택 가족은 근처 카페 와이파이도 훔쳐 쓸 만큼 가난하다. 온 가족이 가난이 몸에 배서 불편해하는 기색도 딱히 없다. 그런대로 화목하고 조금이라도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거짓을 일삼는 것에 가책도 없다. 오히려 기택의 아들 기우(배우 최우식)의 말처럼 학력과 문서위조를 '거짓'이라고 생각조차 않는다.

이 모든 건 기생을 위해서다.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고 노력하겠다는 생각보단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에게 붙어서 살아가겠다는 생각이다(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다고 볼 수 없고, 영화에선 설명되지 않은 어떤 상황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마치 숙주에 붙어 피를 빠는 기생충처럼 기택네는 온 가족이 전부 박사장(동익)네 골수를 빼먹기 시작한다.

여기서 신기했던 건 숙주 역할을 맡은 박사장 부부가 놀라울만큼 어리숙하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박사장의 부인 연교(배우 조여정)는 나이에 맞지 않게 속임수와 배신, 그리고 인간에 대해 잘 몰랐다. 얼핏 보면 공과 사를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 같지만 그녀는 자기 집 지하에 벙커와 같은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무려 4년간 동고동락한 가정부 문광에게도 까마득하게 속았다. 숙주가 이렇게 무지하니 그 빈틈을 본 '충'들은 득달같이 달려들 수밖에.

기택네가 박사장네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철저한 기생이 시작된다. 심지어 기택네보다 먼저 그 집에 기생해왔던 더 아래 계급의 문광네도 있다. 영화는 완벽히 '기생'의 단계를 속도감 있게 다룬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기대 사는 삶. 그 가운데엔 무지한 숙주와 영악한 '충'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어떤 계급에도 관대함을 보이진 않는다. 어떤 집단이 옳고, 그른지 말하고 싶은 장면은 없다. 그냥 그렇게 기생이 이루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생각해보면 기생은, 불가피한 생식구조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높은 계급을 속이는 것이 범죄나 거짓이 아니고,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계급에게 관대한 것이 진심어린 친절도 아니다. 모두가 기생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그것이 완벽히 이루어지면 (벌레가 숙주에 완벽히 적응하면) 집단은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들러붙는 과정에서 숙주는 벌레의 존재를 잘 몰라야 하고, 벌레는 깔끔히 기생을 잘 완수 해야한다. 모두가 살기 위한 질서를 유지하는 절차다.
 
3. 공생
 

▲ 기생충 기생충 극 중 부부 기택과 충숙 ⓒ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기생하는 내용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기택이 결국 박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은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극에 많은 변주를 주면서도 이야기를 촘촘히 끌고 간다. 박사장의 죽음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고 어찌 보면 납득되기도 한다. 그를 결국 죽여야지만 영화가 완성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태여 그가 죽는다.

사실 그의 죽음에 많은 질문이 남았다. 기택이 박사장을 죽인 것은 박사장이 언급한 '냄새'란 말에 기택의 심기가 불편했던 탓일까. 영화는 너무도 쉽게, 처음에 던진 미끼를 회수하듯 박사장을 이용한다. 박사장은 기택에게서도 행주 삶는 냄새인지,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인지 모를 것이 난다며 연교에게 험담을 한다. 그 후 박사장은 문광의 남편 근세(배우 박명훈)의 칼부림으로 난장판이 된 파티에서, 근세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도 코를 틀어막는다.

박사장은 '냄새' 때문에 죽었다. 그렇게 '냄새'가 난다고 핀잔을 주던 입장에서, '냄새'가 나는 장본인인 기택에게 어이없게도 단 한번의 칼부림으로 죽는다. 아주 무력하고 황당하게 말이다.

이 부분이 약간 납득이 가지 않았던 건, 기택네 가족은 가난에 대해서 크게 부끄러워 하지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는 가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끼리는 화목했고 그들이 꾸며 놓은 사기극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동참한 박사장네를 어리석게도 보면서 한 편으로 그 어리숙함에 고마워하기도 했다. 기택의 입장에선 박사장을 인간 자체로서 증오할 이유가 충분치 않은 것이다.

물론 문광네가 더 깊은 지하실에 기생해 사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들보다 더 아래에 있는 계급의 '냄새'를 맡은 후, 그리고 그들을 기택 자신마저 내쳐버렸다는 죄책감에 오히려 반대편에 있던 박사장에게 억울한 심정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운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근세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은 박사장의 태도와 연결지어 그대로 칼을 꽂아버린 기택의 인물 설정은 조금 세련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회수한 떡밥이 너무 쉬웠다. 쉬운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많은 의미를 내포해 놓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장점이자 특징이라 여겼지만, 이 설정은 그냥 말 그대로 쉬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스토리의 진행이 스피디하고 촘촘했다면, 인물의 감정선이나 인물 그 자체에 이입한 연출은 살짝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송강호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연출만으로 감독이 의도한 '공생'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했다. 박사장의 죽음으로 기생할 숙주가 사라진 기택네는 빠르게 파멸한다. 딸 기정(배우 박소담)은 사람들이 보는 한복판에서 죽었고, 자신은 살인자가 되어 가장 최하층 계급이 되어버린다. 원래 기택의 계급만도 못한 살인자이자 은둔자의 신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붙어살던 숙주가 죽으면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적응했던 벌레도 같이 죽는다. 이것이 공생, 즉 공생하지 못하면 공멸,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하는, 적이자 동료의 삶이다.

거짓을 일삼는 것에도 당당했고 오히려 그런 관계를 즐겼던 기택이 자신 또한 망하게 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박사장의 '선을 넘지 말라'는 거만함과 그들의 일시적인 친절, 그리고 결국엔 자신을 같은 급의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그들의 삶에 대한 괴리감 같은 복합적인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했듯, 자신의 먹고사는 생계를 한순간에 뒤엎을 만큼 순간의 분노가 그렇게나 쌓여왔을 거라는 설정에는 조금 무리수가 있다. 납득시키기 위해선 기우보다 기택의 분량이 더 많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4. 장르
 

기생충 이선균 ⓒ CJ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란 부분이 장르였다. 지금껏 봐왔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굵직한 하나의 장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생충>은 장르 불문이었다. 초반엔 영화 <괴물>에서 보여줬던 코미디와 가족물이 중심이었다면 중반부, 빗 속 문광의 등장 이후부터 엄청난 스릴러물이 된다. 완벽하게 스릴러라고 칭하기도 뭐한, 새로운 유형의 공포였다.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공포. 문광이 급하게 지하칠 계단을 내려가면서 뒤를 쫓는 카메라에, 그 앞엔 무엇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깜깜한 공포. 관객들은 대부분 그런 미지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영화는 여기에서 장르를 끝내지 않는다. 마지막은 정말로 피가 난자한 살인극이 펼쳐지고, 문광의 남편 근세 또한 기괴하고 엽기적인 공포를 불러내는 인물로 쓰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씁쓸한 기분을 남기며 영화가 끝난다. 장르 불문. 사람들이 봉준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납득이 갔던 부분이었다.

그 변이 또한 꽤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급작스런 감정 변화였지만 개연성이 떨어진다기보다 앞으로 나올 내용이 궁금하게끔 하는 기법으로 쓰였다. 또한 장면 장면마다 너무나 공들인 카메라 연출이 돋보였다. 기우의 머리 위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오는 장면이 반복된다든가, 문광이 기택 가족을 찍은 핸드폰을 사수하려는 장면에서 기택 가족이 정말로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핸드폰을 뺏으려 하는 장면이라든가. 우스운 것 같지만 결코 우습지 않은,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코미디극을 장면 하나하나로 실현시켰다. 장면과 소품에 많은 공을 들여 영화를 애정하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5. 연출
그래서 동시에 답답하단 생각이 든 것이 연출이었다. 너무나 공을 들인 장면들, 감독이 꼭 말하고 싶은 부분만이 들어간 것만 같은 소품들, 그런 것들이 한시도 앵글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연스러움과는 조금 거리가 먼, 너무나 통제가 잘 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의도적으로 구상한 영화였겠지만, 예술 그 자체로서의 느낌을 발산했는가에는 의문이 든다.

심지어 "참 상징적이네요." "이게(돌이) 나한테 자꾸만 와." 같은 인물의 대사들. 혹은 문광이 근세를 마사지 해주며 읊는 북한어로 표현한 말들. 모든 것이 감독의 손아귀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런 하나하나의 디테일한 것들을 자신이 의도한 그대로 관객이 알아봐주기를 기대한 것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금에와서 보면 <기생충>에 대한 해석이 여기저기 난무하지만 그것을 실은 감독이 의도했던 게 아닌가, 우리 또한 결국 누군가의 의도대로 영화를 관람했고, 그에 맞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거부감이 올라왔다. 구체적이지 않고 너무나 상징적인, 그렇다고 그 상징이 크게 어렵거나 많이 비튼 것은 또 아닌 적당한 깊이의 상징들이 개인적으로 조금 어지러웠다.

그래서 내가 아쉬워 하는 부분은, 감독의 통제 하에서 마음껏 발현되지 못한 '인물' 부분이었다. 캐릭터를 잘 살려준 조여정 배우의 연교역 또한 인물의 재미가 돋보였지만 그 개성이 '자연스러움'의 영역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물의 역할 또한 감독이 의도한 주제의식을 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뿐, 제대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시선이 사회를 담은 예술에 초점이 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찌됐든 예술은 어떤 소재도 도구로써 사용하면 조금 아쉬워질 수 있단 생각도 든다. 초반부 인물들의 대사 또한 조금 유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 같다.
 
6. 주제의식

감독은 예전 작품에서도 계급 차 혹은 빈부차를 이야기하곤 했다. 어떤 인터뷰에서 감독은 어떤 인간이든 빈과 부를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바로 주변만 둘러봐도 계급의 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다수다. 아니 사실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린 모두 같은 사회 안에 살고, 우리가 만든 규칙과 약속 안에서 여러 가지 사연을 꾸려가며 산다. 때론 그 안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이별을 하고 사랑을 하며 욕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자존심을 부리기도 하고 자존감이 깎여 날을 세우기도 한다.

별것 아닌 존재들끼리 별것 아닌 것들을 하느라,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소하다. 허무하고 조잡하다. 우린 결국 감정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서로에게 기생하며 결국 공생하는 관계인데, 그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에 자부심을 부리고 거들먹거린다.

우리보다 작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동물을 아껴도 그들을 우리와 동급으로 보지 않는 게 대부분이며 곤충은 죽이기에 바쁘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들끼리도 이기심을 부리며 제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가장 상위 계급을 꿰찬 인간임에도 자기들끼리 또 계급을 나누고 계급을 바꾸느라 열심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신의 존재였다. 난 신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신이 우리를 만들어놓고 우리를 돌아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조차 믿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보다 더 큰 계급에 신이 있고 그 아래에 우리 인간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린 기껏해야 공생해봤자 우리끼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 그저 다일 뿐이라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해봤자 결국 소파위에서 섹스를 하든 지하실에서 섹스를 하든 모두 외로운, 혹은 욕망과 쾌락에 연약한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최대한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은 달랐다. 모든 인간은 같이 외롭고 한낱 인간에 불과할 테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인간의 룰 때문에 노력을 해도 보상 받지 못하는 시스템에는 제동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 극 중 기택네처럼 노력도 없이, (물론 기택네가 과거에 어떤 노력을 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떤 가책도 없이 기생하려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에 무지한 박사장네를 두둔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신이 있다면,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적어도 딱 그 정도의 보상은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드러운 진심을 가진 존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기생 하면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공생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생충 봉준호 송강호 최우식 황금종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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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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