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10월 1일'이 사라진 이유

[대구 완전 학습] 전국으로 퍼져나간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등록 2019.10.01 09:10수정 2019.10.0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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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은 저서 <한국분단사 연구>에 1946년 10월 1일-3일의 '대구 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경북대 의대 전신)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라고 기술했다. 사진은 경북대병원의 모습. ⓒ 정만진


1946년 2월 미군정은 미곡 강제 매입을 실시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계획 대비 74.4%의 하곡이 수집됐다. 강원도를 제외하고 전국 최고의 실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군정은 미곡의 운반과 매매를 금지했고, 저항하는 농민은 투옥했다.

3월 미군정은 콜레라 방역을 이유로 대구 둘레의 교통을 차단했다. 대구 주변의 농촌에서 약간씩 곡식을 구해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시민들이 이제는 굶어죽을 처지에 빠졌다. 미군정 및 경찰과 결탁한 친일파와 관리들이 배급할 곡식을 빼돌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해방 직후 140원하던 쌀 한 말 가격이 1년 사이에 10배나 올라 1500원으로 치솟았다. 시민들이 식량 배급을 요구하면 미군정은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내놓으라고 하느냐?'고 불평했다. 불만은 쌓이고 쌓여 언젠가 한꺼번에 폭발할 시한폭탄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9월 총파업이었다.

해방 이후 1년 동안 쌀값 10배 폭등

9월 총파업은 대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전국 총파업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지휘를 받은 경찰의 진압에 눌려 대부분 지역의 파업은 분쇄되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저절로 약화되었다. 대구는 반대였다. 대구 일원의 파업은 진행 양상이 아주 특이했다. 대구는 파업 차원을 넘어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대구의학전문학교(경북대 의대 전신)의 본래 모습. 대구근대역사관 게시 사진임. ⓒ 대구근대역사관


발단은 10월 1일의 경찰 발포였다. 경찰의 총격에 시위 군중 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대팔연탄공장에서 일하는 20세 안팎의 청년 황팔용(또는 황말용)이었다.  

10월 2일 아침 대구의전(경북대 의대 전신) 학생 수십 명이 그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대구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군정은 콜레라 방역 소홀을 비판한 의전 교수 이상요를 공무집행방해죄로 구금한 적이 있었다. 대구의전이 10월'항쟁'(국사편찬위원회 누리집 <신편 한국사>의 표현)의 진원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시위 군중의 가장 강력한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대구 중부경찰서(당시 대구경찰서) 내 전시실에 게시되어 있는 박중양의 모습. 사진 아래에 '박중양은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46년 당시 시민들은 잠시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기도 했다. ⓒ 대구중부경찰서

 
대구 시민들이 항의 시위가 큰 규모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군중들이 시위에서 가장 많이 요구한 것이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였는데(<신편 한국사>), 일제 강점기 때 독립지사를 고문하던 친일 경찰이 해방이 된 후에도 시민을 쏘아 죽였으니 사태 악화는 불을 보듯 뻔했다. 군중은 한때 대구경찰서를 점거했다.  

당시 대구는 건국준비치안유지회·탁치반대공동투쟁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을 좌파와 우파가 함께 꾸려가고 있었다. 해방 이후 대구의 좌파 진영은 유연한 전술·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지역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이는 미군정의 탄압에 밀려 좌파가 약화된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9월 총파업 투쟁도 대구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함께 이끌었다. 이에 대해 <신편 한국사>는 "대구의 파업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좌파 진영의 의도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다만 그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대구·경북 좌파 진영의 존재가 있었다"라고 진단했다.

"불행한 사건... 우리 민족의 아픔"

10월 1일 시작된 대구의 항쟁은 도시 외곽으로 확산되었다. 경북 전역으로 번져간 항쟁에는 32만 명이나 되는 민중이 참여했다. 민중은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 식량난과 생활난 해결, 미군정 정책 정상화, 좌익인사 석방, 민주주의 실현 등을 요구했다. 전국으로 번진 항쟁은 12월 8일 전북 전주에서 막을 내렸다.

<대구시사>는 1946년 10월의 참사에 대해 "10월 1일에 경찰과 노동평의회 사이의 마찰로 시작되어 10월 2일에 노동자와 학생이 경찰을 무장해제하고 폭도화하여 일으킨 대구에서의 무력 폭동 사건"으로, 사흘 만에 "대구에서만 사망자가 27명, 부상자가 61명, 건물 파괴가 156건이나 되는 막심한 피해를 내고 전국적 사회혼란을 초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는 사상적 혼란 속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으로, 이후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살해 과정을 거쳐 지금도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라고 평가했다. 표현 속의 '피비린내 나는 살해 과정'은 1947년 7월 19일의 여운형 암살, 1949년 6월 26일의 김구 암살 등은 물론 이른바 보도연맹 집단 학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1만여 명이 죽임을 당해 전국 최대의 민간인 학살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 입구의 가창못 못둑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조정훈 기자가 2013년 7월 31일에 촬영한 것으로, 박정희 무용가(현 대구 북구의회 의원)가 신원을 비는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다. ⓒ 조정훈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대구
  
이승만 정권은 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묶어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 사상에 물든 '국민'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였다. 지역할당제로 강제 가입을 시킨 탓에 1949년 말경에는 가입자가 무려 30만 명이나 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를 무차별로 집단 학살했다. 대구와 인근에는 1만여 명이 죽임을 당해 전국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곳으로 추정되는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을 비롯, 남구 대명동 빨래터, 달서구 학산공원, 동구 파군재, 경산시 코발트 광산, 칠곡군 신동재 등이 학살 장소로 알려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무차별로 끌려가 까닭도 없이 학살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두산백과> 참조)
  

보도연맹 학살지 중 한 곳인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 빨래터'의 입구 모습. 민간인 학살과 관련되는 내용 안내는 전혀 없고, 이곳에서 '빨래터 축제'가 진행된다는 현수막만 보였다. ⓒ 정만진


<대구시사>에 따르면 대구 시민 전체 20만 명 중 1만 명이 10월항쟁에 참여하였다. 현재로 환산하면 245만 중 12만 명이 '폭도(<대구시사> 표현)'로 나선 것이다. 평화 시위도 아니었다. 실로 엄청난 인원의 참여였다.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하면 적어도 10명 중 1명이 '폭도'였다.

1946년 10월을 말해주는 표식이 전혀 없는 이유

대구에는 '1946년 10월'을 말해주는 표식이 전혀 없다. 그것이 10월항쟁이든, 10·1사건 또는 10·1폭동사건(<대구시사>)이든, 대구 사태(신복룡, <한국분단사 연구>)이든, '지금도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라면 뭔가 말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대구근대역사관조차 아무 언급이 없다. 

대구가 보수 일변도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보인다. 1997년 대구가 김대중 당선인에게 12.5% 투표했을 때 밀양은 10.1%를 주었다. 그런데도 '빨갱이' 김원봉, 윤세주 등의 고향 밀양에는 의열단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1946년 10월을 말해주는 표식이 대구에 전혀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도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은 바 없다. 가설을 세워본다면, 10명 중 1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폭도'였다는 점이 해법의 실마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자신의 '폭도' 경력이 조명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월항쟁 #김원봉 #미군정 #1946년 10월 #10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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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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