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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된 후 관람한 '기생충', 그저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리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19.06.20 18:36최종업데이트19.06.2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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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을 폐업하고 백수가 된 월요일, 얼떨떨하고 낯선 기분으로 책을 읽으려다 말고 뭘 써보려다 말고를 거듭했다. 하루 종일 '하려다 말고'를 하다 보니 밤이 되어버렸다. 이런 하루가 내일도, 그다음날도 이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일단 뛰쳐나갔다. 목적지는 원래 퇴근 후에 가던 크로스핏 센터. 고강도 근력운동 4가지를 순환 반복으로 4세트를 하다 보니 '이건 언제 해도 힘든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퇴근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하느라 힘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앞으로의 백수 생활도 피곤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땀을 흠뻑 흘리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나온 김에 그전부터 보려고 벼르고 있던 영화 <기생충>이 생각 났다.
 

영화 <기생충> 중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백수가 된 첫날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아서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 초반은 익숙한 블랙코미디의 공식을 따라가는 듯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네 가족은 전원 백수로 휴대폰이 끊기는 등 생활고를 겪지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족 4명이서 피자박스 접는 부업을 하고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맥주파티를 하는 모습은 극 중 이들이 가장 행복해 보이는 장면이다.

영화에는 세 가족이 등장한다. 기택네 가족, 박사장(이선균)의 가족, 가정부 문광(이정은)과 남편 근세(박명훈)다. 장남 기우(최우식)가 박사장의 집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기택의 나머지 가족도 박사장의 집에 취업을 하게 된다. 물론 가족관계와 학력, 경력을 위조하고 말이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박사장 가족이 돌연 캠핑 일정을 취소하고 불시에 집에 돌아온다. 이때 박사장의 아내 연규(조여정)가 한우 채끝살을 넣은 '짜파구리'를 가정부 충숙(장혜진)에게 주문한다. 짜파구리는 짜장 라면과 일반 라면 두 제품을 섞어서 끓인 것으로, 봉준호 감독이 영화에 나오는 세 가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건 한국 사람만 알 수 있는 부분인데, 보고 있자니 왠지 감독과 한패가 된 기분이다. 기택의 가족이 마시는 맥주가 '국산 제품'에서 '일본산 제품'로 바뀌는 것은 칸에서 알았을까?

은유나 상징적인 설정은 봉준호 감독의 주특기로 영화 <기생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폭우로 완전히 잠겨버린 기택의 반지하 방과 비 한방울도 새지 않는 박사장의 막내 다송이(정현준)의 장난감 미제 텐트가 대비되게 보여주는 장면도 그 중 하나이다.

기택의 가족에 동질감 느끼면서...

영화는 중반으로 가면서 장르가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바뀌어버린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빠른 전개에 무섭도록 빠져든다. 너무나 능숙한 감독이 틈새 하나 없이 세밀하게 작업한 완성본을 보는 느낌이다. 배우의 연기, 시나리오, 연출로 완벽하게 그려 논 그림에 디테일한 재미 요소로 장식한 것 같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한 것 같은' 느낌의 근거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술 작품을 보고 가슴이 묵직해질 때가 있다. 예술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 손으로 길어 올린 무언가 때문에 숙연해지는 기분.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만 내가 찾아낸 소중한 것 덕분에 내 것이 된 것 같은 영화가 있다. <기생충>은 아니었다. 마치 철저하게 조종당한 기분이었다. 자유롭게 사유할 수 없었다. 내 영화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은 내가 박사장보다는 기택의 가족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삶이 화려하도록 그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삶.  나의 자격지심인가. 백수가 아니었다면 이를 가볍게 볼 수 있었을까.
 

영화 <기생충> 중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막걸리 한 병을 사왔다. 아침에 부쳐놓은 김치전이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냥 김치전이 아니다. 김치에다가 참치와 양파를 넣고 요즘 탄력받고 있는 나의 요리 실력으로 부쳐낸 것이었다. 막걸리는 어찌나 단지, 이게 천 원이라서 더욱 좋았다.

나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게 해주는 영화가 좋다. 그저 취향 문제라고 해도 좋다. 단순한 것이 좋다. 자연이 그렇듯. 막걸리와 내 김치전은 소중하다.

행복하기 위해서 박사장네 같은 거대한 저택과 가정부, 운전기사, 온갖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듯 영화에 그 많은 장치가 필요한 걸까. 또 다른 박사장을 보는 것 같아 괜히 착잡해졌다.
기생충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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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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