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장 '위험한' 국립공원, 지금은 딴 세상

[발칸반도 기행 27]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하류 기행

등록 2019.06.14 11:04수정 2019.06.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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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세계적인 명승지 플리트비체(Plitvička) 호수 국립공원에는 트래킹 코스가 다양하게 있는데, 자유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는 H코스이다. 이 트래킹 코스는 상류에서 하류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어서 부담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상류의 호수와 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하류 쪽 물길을 따라갔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상류가 차분하고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여행자들이 많이 몰리는 하류 트래킹은 더 활기찬 느낌이다. 짧은 일정상 당일치기로 플리트비체에 여행 오는 사람들은 하류 부분의 하이라이트 구간만 집중적으로 보고 가기 때문이다.


하류 쪽으로 갈수록 다른 트래킹 코스에서 넘어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코스가 다른 이들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 하지만 국립공원이 워낙 커서 줄을 서서 이동할 정도로 불편하지는 않으니 참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다.

나와 아내는 나무 데크와 흙 길을 걸어가며 너무나 천천히 산책을 했다. H코스가 최대 6시간 소요되는 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하루를 온전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호수 주변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천천히 걸으니 오래 걸어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다.
 

플리트비체 폭포수. 다양한 폭포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멈춰 서서 사진을 찍게 된다. ⓒ 노시경

 
플리트비체의 다양한 폭포와 호수는 느낌이 서로 다르면서도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점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공원 내부의 데크와 쓰레기통, 안내표지판 등을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공원 내에서는 수영과 취사, 낚시는 물론 애완동물의 출입도 금지하고 있었다. 플리트비체의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 지켜져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대한 이러한 노력 속에 호수 주변에는 너도밤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울창하게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폭포와 수심 깊은 호수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물빛은 환상적인데, 청록색으로 찬란하던 호수는 어느 순간에 에메랄드 빛으로 변해 있다. 이 맑은 호수 위에는 발길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오리들이 한가하게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호수의 송어 떼. 맑은 물 속에서는 수많은 송어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 노시경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을 보니 맑은 호수 가장자리 물 속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1급수에서만 산다는 송어들이다. 송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전혀 동요 없이 편하게 놀고 있다. 새끼 송어들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면서 마치 놀이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다. 이곳에는 이 물고기들을 잡아갈 천적이 없으니 정말로 삶이 평화로운 물고기들이다.

석회암 지대를 흐르는 플리트비체 강의 강물은 무려 92개의 폭포와 16개의 크고 작은 호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행자들의 산책로인 나무 데크의 길이만 해도 총 18km나 된다. 600여 m의 높은 곳에서 시작된 강물은 해발고도 150m 되는 곳까지 마치 계단을 내려가듯이 흘러 내려간다.

호수 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워낙 투명하고 맑아서 우거진 나무들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 국립공원 일대를 '악마의 정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악마의 정원은 1949년에 크로아티아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립공원이라고 불린 적이 있어."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 크로아티아 군이 세르비아 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에 수많은 지뢰를 매설해 놓았지. 그래서 유네스코 자연유산에서 탈락할 위치에 처했던 거야. 다행히 현재는 이 지뢰들을 모두 제거해서 유네스코 유산에 계속 남아 있게 된 거지."

 

석회암 동굴. 호수 옆에 뚫린 동굴을 통과해 올라가면 플리트비체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 ⓒ 노시경

 
나와 아내는 폭포수의 향연 속을 걷다가 호수 옆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동굴을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유독 어두운 동굴을 싫어해서 나 혼자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동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물에 젖어 미끄럽고 살짝 위험했다. 나는 계단을 굽이굽이 돌아 동굴 위로 올라갔다.
 

S자 나무 데크. 플리트비체를 감상하는 여행자들과 폭포수가 한눈에 보이는 명소이다. ⓒ 노시경

 
동굴 제일 위까지 올라갔다가 플리트비체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를 만나게 되었다. 동굴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책로인 S자형 나무 데크 위에서 여행자들이 호수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 일대 장관이었다. 나무 데크 바로 뒤에서는 작은 실폭포들이 줄을 지어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산 언덕 위에서도 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은 더할 나위 없이 투명했다.
 

벨리키 슬라프. 플리트비체에서 가장 큰 폭포로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되었던 곳이다. ⓒ 노시경

 
나와 아내는 조금 더 산책로를 걷다가 드디어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폭포, 벨리키 슬라프(Veliki slap) 폭포를 만나게 되었다.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되어 더욱 유명해진 폭포이다. 플리트비체에서 가장 높은 70m 위에서 쏟아지는 폭포수가 일대장관이다. 이 큰 폭포를 만난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었지만 국립공원 출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벨리키 슬라프 폭포 아래에서 편히 쉬던 나와 아내는 다시 호수 길을 산책했다. 그런데 눈썰미 좋은 아내가 우리나라의 한 연예인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한 방송연예인이 진행하던 토크쇼 프로그램에 나오던 여성 듀오 가수인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그녀들을 아내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수 누구 맞지요?"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선글라스 쓰고 있는데. 알아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팬인데, 사진 함께 찍어도 돼요?"


이 여성 듀오 뮤지션들은 아내가 사진을 찍자는 말에 스스럼 없이 응해주었다. 아내는 넉살 좋게 두 여성 연예인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녀들도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한국 아주머니가 편했던 모양이다. 그녀들은 너무나 밝고 겸손해서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과 헤어진 후 뒤돌아 서서 보니 그녀들도 이제는 선글라스를 벗어버리고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뭇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던 젊은 연예인들이 선글라스를 벗고 편하게 여행하기로 한 것 같다. 나는 그녀들의 앞날에 꽃 길이 펼쳐지기를 빌어보았다.
 

플리트비체 여행자들. 호수공원 안의 여행자들은 여유 있게 여행을 만끽한다. ⓒ 노시경

 
호수 산책로는 산 언덕을 돌고 돌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이 길은 얼마 전에 내가 올라왔던 동굴 위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동굴 위 쪽의 산책로가 우리가 걷던 H코스가 끝나가는 부근의 산책로였던 것이다. 이 길을 다시 오게 될 줄 모르고 바쁘게 이곳저곳 사진을 남기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걷고 또 걸었다. 아쉬움 속에 걷는 길은 포장도로로 바뀌더니 국립공원 셔틀버스를 탈 수 있는 출입구1의 버스 정류소가 나타났다. 놀라운 풍경 속 여행을 마친 전세계 여행객들을 태운 버스는 나무숲을 제치며 출입구2 정류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여유 있게 산책하고 사진을 찍으며 국립공원 내에서 한나절을 보냈지만 왠지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무키녜 마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인근의 무키녜는 편안한 휴식의 최적지이다. ⓒ 노시경


무키녜 마을의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숙소 주인 랏코 그루비치(Ratko Grubic) 씨와 커피를 마시며 인생을 이야기했다. 나는 플리트비체의 자연에 취해 있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플리트비체 #플리트비체여행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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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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