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현빈이 탄 기차를 탈 걸

[이베리아반도 방랑기3] 코르도바에 들르지 못한 채 그라나다로!

등록 2019.06.11 09:02수정 2019.06.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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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에서 이베리아반도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직접 운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차를 빌렸고 약속한 렌터카 업체에 차를 찾으러 가는 날이다. 숙소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렌터카 사무실이 있다는 톨레도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고 했으니, 오전 10시까지 도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붉은 벽돌과 타일로 장식된 기차역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에서인가 돌아오고 있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에서 히드로 공항이 보여줬던 환대와 배웅의 수많은 사랑이, 전 세계의 모든 기차역에서도 같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따뜻하게 보였다. 
    

톨레도 기차역입니다! 어디 무슨 박물관처럼 보이지만, 절대 아니죠. 보기만해도 근사하다, 탄성을 자아내는 톨레도 기차였입니다. ⓒ 이창희

        
"네가 빌린 차, 수동이야. 괜찮겠어?"


렌터카 사무실의 직원은 내가 수동을 운전할 줄 알까 하는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내면서 여러 번 다시 묻는다. 마치, 수동 차량을 운전하겠다는 것은 장마철에 에어컨 없는 차를 운전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마도 내가 수동변속기를 가진 무적의 엘란트라를 20년 가까이 몰았다는 것을 말하면 놀랄 것 같아서, 참았다.

유럽은 아직도 수동 변속기를 가진 차량이 더 많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수동 변속기를 가진 차량은 좀 더 저렴하게 빌릴 수 있으니 나에겐 유리한 선택이다. 이런저런 사항을 확인하고 나서 차량을 받았더니, 오전 11시 반이 넘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의 일정이 모두 틀어지는데, 렌터카 회사 직원한테 항의를 해 봤자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랴부랴 숙소를 나서서, 원래 목적지였던 코르도바로 내비게이션을 설정한다. 도착 예정시간이 오후 3시 반이라고 하는데, 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과 함께 운전을 시작했다. 오늘 중으로 그라나다에만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1시간 정도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기에 '안달루시아'라는 지역명이 표시된 전화가 울린다. 

"너 오늘 언제 와? 체크인 카운터 근무 6시까지니까, 늦지 마!"

오늘 머물기로 한 그라나다의 숙소에서 걸려온 전화이다. 이렇게 되면 코르도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급하게 서둘러서 메스키타(코르도바의 이슬람 사원)만 보고 온다고 해도, 돌아오는 길이 너무 바쁠 것 같다.


이번 여행에 차를 빌린 이유는 이베리아반도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면 들러보겠다는 목적이었는데... 이렇게 바로 그라나다로 갈 것이었다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현빈이 탔던 기차를 탈 걸 그랬다. 하지만, 후회해도 늦은 것. 어쩔 수 없이 방향을 그라나다로 옮기고 다시 운전을 이어간다.

스페인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의 시작은 단조로웠다. 나지막한 둔덕에는 줄을 맞춰 올리브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올리브 나무가 줄을 맞춰 커가고 있었다. 높은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 것은 그라나다에 가까워지면서였다.

갑자기 눈앞에 절벽처럼 산들이 나타났고, 조금 더 멀리로는 머리에 아직 흰 눈을이고 있는 시에라 네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남부 스페인이라면 한낮의 태양이 40도에 가깝게 뜨거운 곳일 텐데, 만년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산맥이라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근처의 공용 주차장을 찾아봐. 우리 숙소에는 따로 주차장이 없어."

그라나다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체크인을 하고 주차장이 없는지 물었더니 근처의 공용 주차장을 찾아보라고 한다. 분명히 주차 가능한 숙소를 예약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오늘은 정말 실수가 많다.

게다가, 그라나다 중심부로는 거주자만 우선적으로 차를 갖고 다닐 수 있다면서, 가능하면 차를 그대로 주차장에 세워두는 게 좋다는 주인장의 조언이다. 이럴 거면 정말 차를 괜히 빌렸다는 후회가, 이로써 확고해졌다.
 

전망대로 이동할 때 탔던 버스예요! 집으로 돌아올 떄 다시 만났습니다. <이웃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버스처럼 비좁은 골목길을 어찌나 날렵하게 말처럼 달리는지, 정말 깜짝 놀랄 운전실력이었다니까요! ⓒ 이창희

  
"해가 지는 것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해?"
"알바이신 지구의 전망대 (Mirador San Nicolás)!"


숙소에 물었더니 해가 지는 전망을 보기 좋은 곳을 알려준다. 이곳의 여름은 우리보다 훨씬 해가 길어서 오후 9시 반은 되어야 해가 진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길래, 전망대 주변의 식당에 플라멩코 공연을 예약했다. 사실 아까 오는 길에 걸려온 전화에 '안달루시아'가 표시된 후로, 플라멩코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참이었다.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저항의 중심에 권력으로부터 추방된 집시와 플라멩코가 있었다는 것이 연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챙겨 입고 구글이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타고 전망대에 내렸다. 봉고차를 변형한 것처럼 생긴 작은 버스는 그라나다 시내의 비좁은 골목길을 말처럼 달렸고, 같은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리는 곳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전망대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언덕을 약간 올라갔더니, 이 풍경이 눈 앞에 먼저 보이더라구요. 모두가 무언가 절실하게 기다리는 저 표정, 말이예요. ⓒ 이창희

   

와!!! 얼른 전망대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구요. 알람브라 궁전과 궁전이 내려다보이는 시내의 모습, 아름다웠습니다. ⓒ 이창희

    
알바이신 지구는 예전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라고 한다. 연한 주황색의 기와를 얹은 지붕과 눈부시게 하얀 회벽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다운 골목길이었다. 게다가, 숙소에서 알려준 전망대에서는 눈앞으로 알람브라 궁전의 전경과 멀리로 만년설을 이고 있는 시에라 네바다의 장엄한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플라멩코 공연에 다녀왔더니 석양의 태양빛을 가득 머금은 알람브라 궁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잡고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렸다. 같은 목적으로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전망대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어서, 자리를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석양에 물든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입니다. 붉은 노을을 그대로 받은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이,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보였떤 모습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네요. 아름답습니다. ⓒ 이창희

           

안녕, 알람브라!!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과 함께, 내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일단 철수했습니다. 안녕, 내일 다시 만나! ⓒ 이창희

   
여름의 햇살은 느지막이 오늘의 세상과 인사를 나눴고, 알람브라 궁전은 빛을 잃었다가 조금씩 인공의 빛으로 다시 밝혀졌다. 그 자리를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코르도바에 들르지 못한 것은 계속 아쉬웠지만,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일 테니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라나다의 숙소의 작은 정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고개를 들었더니, 고향의 하늘에서 만났던 북두칠성이 보였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여행지에서 실수가 많아질수록, 떠나온 곳의 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이것 또한 여행이 알려주는 가르침이겠지? 그리워할 수 있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베리아반도 방랑기 #코르도바 #그라나다 #성 니콜라스 전망대 #알람브라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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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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