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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어셈블!' 이후 펼쳐질 마블의 세계, 무얼 담을까

[리뷰] 양자역학과 함께 본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

19.05.03 17:49최종업데이트19.05.0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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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엔딩 때 받은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타노스(조슈 브롤린 분)는 목적을 달성했고, 인구의 절반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전작의 끝이었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은 평화로운 일상 중에 가족 모두가 사라지며 시작된다. 누군가가 눈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충격과 공포가 호크아이(제레미 러너 분)를 통해 그려진다.

타노스와의 대결로 부상을 당한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은 희망을 잃은 채 네뷸라(카렌 길런 분)와 우주 공간을 떠돈다. 그의 유머는 여전하지만 거기에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구로 귀환한 그를 맞이하는 건 우주 공간에서 느낀 절망감뿐이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포스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타임 하이스트', 침입자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전반부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얼마 남지 않은 어벤져스 군단이 남은 힘을 짜내 타노스를 제거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어벤져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재편된 우주의 질서를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가 없었다. 그토록 당당하던 블랙 위도위(스칼렛 요한슨 분)는 눈물을 흘리고, 호크아이는 암살자가 되어 떠돌고, 아이언맨은 어벤져스가 아닌 일반인으로 돌아간다. 히어로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듯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분)는 치유 활동을 하지만, 내면에 깔린 절망감은 어찌할 수가 없다.

시간이 이들에게 데려온 것은 망각이 아니라 무력감이다. 수긍과 수용이 쉽지 않은 현실은 삶을 영위할 활력을 앗아갔다. 마치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문이 아닌 동력이 될 실제적인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나타났을 때 어벤져스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 희망은 '시간 여행'이었다. 뻔한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가상으로 창조된 세계의 스토리 내에서조차 논리적으로 펼쳐내기 부담스러울 터였다. 

영화는 소재의 비현실성에 대한 부담감을 헐크(마크 러팔로 분)와 브루너의 결합이나 로켓의 존재 등으로 털어내 보려 한다. 많은 예로 그럴 듯해 보이려는 수작이다. 흔하디 흔한 대안인 시간 여행은 '타임 하이스트'라는 낯선 명명으로 진부함을 떨쳐 보고자 한다. 그래 봐야 스톤을 찾는 행위의 반복이다.

<엔트맨과 와스프>를 통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결말이 야기한 후속 스토리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기엔 살짝 부족했다. 타노스가 어째서 그토록 과감하게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분)의 스톰 브레이커로 참수형에 처해진 것이었나를 납득시켜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간 여행이 전개된 양상은 특기할 만했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시간 여행은 워 머신(돈 치들 분)이 줄줄 읊었대던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빽 투 더 퓨처> 류의 영화에서 사용된 시간 여행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시간의 주행을 거스르는 타임 슬립 류나 타임 머신을 이용한 타임 리프, 반복된 시간 속에 갇히는 타임 루프 류의 영화는 대체로 변형된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쳐 인물이 원래 살던 시대, 곧 '현재'인 '미래'를 변형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타임 하이스트'라는 설정은 이와는 다르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타임 하이스트'는 시간 여행을 하는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과거로 돌아간 것으로 인식된 상황은 여전히 주체의 현재이다. 그것은 시간의 역전이 아니며 주체는 일정 기간 다른 차원, 영화에서는 '양자영역'이라 명명된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머물다 떠나 온다. 그 세계는 주체가 원래 사는 세상이 존재하듯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주체는 필요에 의해 그 세계에 진입하고 그 세계에서 목적한 행위를 이어간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주체 역시 필요에 의해 그 차원의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라 명명된 차원으로 올 수 있다. 타노스와 가모라(조 샐다나 분)가 그러했듯 말이다. 따라서 주체가 원래 존재했던 차원의 시간은 뒤틀리지 않으며, '과거'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기에 아직 진행되지 않은 '미래'의 변형과 연결되지 않는다. 미래는 주체가 속한 차원의 앞날이며 활동하는 현재의 결과이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시간 여행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의 진입이다. 사라진 요술봉이 필요해져 우리집하고 모든 것이 똑같은 옆집으로 들어가 똑같은 요술봉을 들고 나오는 식이다. 요술봉을 강탈해 집으로 돌아와 요술을 부린 후, 다시 옆집으로 되돌린다. 침입이 필요하다면 침입할 집은 무수하다. 영역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에는 옆집처럼 다른 차원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우주는 주변의 여러 집들처럼 한 개가 아닌 수 개, 혹은 수십, 수백 개일 수도 있다. 우리와 동일한 존재와 사건이 일어나는 차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무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설정은 히어로의 능력처럼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 말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한다. 동시에 확인하지 못한 모르는 세계로 나아간다. 과학은 그 세계를 향한 거대한 진입로이다. 인간은 '신들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에 화답하듯 해답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모든 결과가 미리부터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답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정해진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만 의도를 가지고 움직일 뿐이다.

양자와 어벤져스

어벤져스는 파괴된 인피니티 스톤이 존재하는 다른 차원으로 가기 위해 양자영역에 진입한다. 어벤져스 기지를 중심으로 스톤이 존재하는 각각의 시간으로 흩어지는 어벤져스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입자처럼 보이며, '양자'의 특성을 보여준다.

양자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이다. 양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이중성을 지닌다. 입자인 양자는 형태로 존재하나 파동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양자의 이중성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도출하지 않으며, 마치 의식을 가진 듯 관찰된다.

인간은 셀 수 없이 무수한 입자들이 결합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마치 파동처럼 서로를 연결하고 간섭시킨다. 인간은 형태로 존재하나 연결된 관계들은 끊임없이 파동을 발산하며, 양자가 아름다운 '간섭무늬'를 만들듯 관계의 망을 이룬다. 이 관계는 가족부터 친구·이웃·직장 동료 등에 그치지 않고, 범인류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작은 원인이 큰 사건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는 망을 이루는 관계의 파동적 특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관계는 파동처럼 보이지 않으나 퍼지며 형성된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어벤져스 군단은 직접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들 되살리기 위해, 간접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라진 인류 절반을 되살리기 위해 양자영역으로 진입한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양자처럼 관계는 어벤져스 군단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어벤져스 군단은 스톤이 존재하는 여러 영역으로 흩어진다. 모종의 힘으로 분리된 양자처럼 이들은 곳곳으로 분산된다. 분리된 양자들이 거리에 상관없이 서로 얽혀 있듯 흩어져 움직이는 어벤져스 개개인은 같은 목적으로 얽혀 있다. 양자의 세계는 마치 인간 세계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양자들의 '얽힘'에서 발생한다. 낱개의 양자로 간주된 어벤져스 1인은 각각의 차원에서 분리되어 존재한다. 분리된 양자들이 영향을 미치며 얽히듯 양자영역으로 날아든 네뷸라와 양자영역에 존재하고 있던 네뷸라 사이의 정보가 얽힌다. 양자영역에서 마주한 캡틴 아메리카도 마찬가지이다. 두 네뷸라와 캡틴 아메리카는 마치 한쪽이 '스핀 업'하면 다른 쪽은 '스핀 다운'하며 얽히는 양자처럼 정반대로 기능한다. 캡틴 아메리카의 얽힘은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나, 연결과 재현이 가능한 저장 매체를 지닌 네뷸라의 얽힘은 양자의 파동이 간섭무늬를 만들듯이 타노스의 개입을 불러온다.

타노스, 필연적인 존재

네뷸라를 통해 타노스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봉착한 것을 목격한다. 타노스에게 필생의 과업이 완수되어 이룬 '완벽한 평형'이 붕괴되는 것은 아니될 일이다. 스스로를 '필연적인 존재'라 일컬으며 자신에 대해 한치의 의문도 품지 않는 타노스는 정해진 정답처럼 명확한 존재이다. 입자로 존재하나 주변의 다른 입자들과 공존하며 파동을 일으키는 이중적인 특성을 지니는 양자와 달리 그는 오로지 입자적 특성만을 지닌다.

타노스는 목적을 향해 직진하며 다른 존재의 간섭과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파동을 만들지도 취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유로,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는지 예측할 수 없는 양자 사이의 '불확정성'은 타노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분명한 존재 이유를 가진 필연적인 존재, 타노스의 한계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한 타노스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파동의 힘을 예측하거나 파악할 수가 없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예측되기 어려운 불확정성과 확실한 결과를 지닌 필연이 대결한다. 필연적인 존재인 타노스가 추구하는 필연은 우주적 질서의 재편이다. 우주는 일정한 궤도와 법칙을 가지고 움직인다. 우주는 우주를 변경하고 지배하려는 의지와 그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투지까지 품고 있다. 타노스의 명확한 목적은 인간들 사이의 연결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반동'을 일으킨다. 그의 존재적 필연성은 질서의 재편 보다는 반동의 형성에서 찾아진다.

곧 죽어도, 우리는 싸운다

인간의 생존과 삶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주적 질서는 인간에게 큰 문제없이 수용될 것이다. 그러나 타노스의 의도와 같이 인류의 삶에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질서에 인간은 쉽게 승복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사람은 없다. 상처를 받은 채 남은 인류는 결과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움직인다. 양자적 특성을 지닌 인간은 결말을 예측할 수 없음에도 가능성만을 붙들고 뛰어든다. 승리를 기원하지만 승리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결말이 결정된 이기는 싸움만을 추구하는 타노스는 다수의 인간들이 생산하는 파동의 끝없는 확산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타노스는 양자적 특성이 제거되어 우주의 질서에 순종하는 존재가 살아가는 새로운 우주 창조를 기획한다. 그러나, 확정된 결말을 뒤집기 위한 인간의 도전은 치열하다. 자신과 가족, 인류의 생존 앞에서 인간의 투지는 뜨겁게 불타오른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죽음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싸운다. 죽음이 눈 앞에 기다려도 인간은 싸울 수밖에 없다.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가 생존한다는 명분만으로도 인간은 용감해진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닥터 스트레인지는 전작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서 1400만분의 1로 이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은 우주의 비밀처럼 베일에 싸여있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 무엇이 어떻게 '1'이 되는지 알 수 없다. '1'은 '1'로 나타난 순간에만 '1'임을 드러낸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인간은 확률을 이용하여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많은 도전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만약, 무엇이 '1'이 되는지 미리 확실한 결과를 알게 된다면 우리의 투지는 사라지거나 약해질 것이다.

입자이나 파동을 보이는 양자의 행태는 매번 반복되는 동일한 실험 결과를 도출하지 않는다. 관찰의 장면마다 다르게 연출되어 확률로 표시되는 양자처럼 우리의 운명 역시 불확정적이다. 우리는 질 수도 있지만 이길 수도 있다. 결말을 예측할 수 없어도 우리는 싸운다. 이 싸움의 향방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가능성을 보고 싸울 수밖에 없다. 지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 싸우지 않는 것이 패배이다.

신은 어디로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은 우주를 재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다. 타노스의 질서에 대항하는 어벤져스 무리는 스톤을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어벤져스의 모습은 과학의 힘으로 창조와 우주의 비밀을 캐내려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은유로도 읽혀진다.

가공할 만한 능력으로 스톤을 모두 손에 넣은 타노스는 마치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필연적인 존재라 스스로 칭하며 자신의 존재에 절대성을 부여한 타노스조차도 스톤에 의지해야만 원하는 '완벽한 평형'을 이룰 수가 있다. 스톤의 주인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스톤이 없는 타노스는 제거될 수도 있는 대상이다. 스톤은 절대적 능력의 구체적인 형상물이다.

타노스에 의해 지구 인구의 절반이 소멸한 뒤에 또다른 위기 앞에 놓여진 상황에서 인간은 목숨을 걸고 스톤을 획득해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절대적 위기 앞에 믿을 구석은 인간 자신 뿐이다. 신은 없거나, 방관하거나, 함께 싸우거나 혹은 스톤 앞에 무력하다. 영화가 감동을 선사하는 지점은 같이 싸우겠다며 파동처럼 번지며 얽히는 인간들의 강렬한 투지이다. 어디에도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할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 신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우리가 인식하는 절대적 신이 사라진 영화의 세계관은 전작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어있는 신의 자리를 꿰찬 것은 어벤져스로 대변되는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인피니티 스톤은 인간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주와 창조의 비밀을 품고 있다. 스톤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다는 것은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획득한 것과 같아진다. 그 실현 가능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모든 우주의 비밀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인간은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생명과 죽음, 창조와 소멸, 시간과 공간 등과 관련한 것들을 부분적으로 접수하고 있다.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기 위해 기여하는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점진적으로 때로는 급속하게 삶을 변화시키며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과학은 기적이라 부르던 것의 실체를 파헤쳐 기적을 이룩하고 있다. 전지전능함은 상상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의 자리가 곧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막강한 힘은 잘못 사용된다면 파멸을 불러오며, 인간의 욕심은 그 힘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싸움을 반복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은 가공할 힘을 획득과 사용에 희생이 따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인피니티 스톤, 곧 획득한 자를 신으로 만들어 줄 우주의 비밀은 그 위력만큼이나 위험하다.

누군가 다시 흩어진 스톤을 모으듯 인간은 신이 되기 위한 행보를 지속할 것이다. 존재와 생명, 자연과 우주를 향한 끝없는 탐구를 인간은 멈출 수가 없다. 거대한 우주 안에서 먼지처럼 작은 존재인 인간은 경외하는 신을 품은 채 부정하는 모순적 존재이다. 걱정되는 것은 신이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의 고독이다. 온전히 모든 것을 기댈 수 있는 절대자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인간에게 어떤 충만감이 남을 수 있을까. 전지전능의 존재를 상실한 채 가능성의 상태로만 남겨진 인간을 인도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우리가 의지할 것은 아마도 과학이 아닌 '서로'일 것이다. 전멸될 위기의 순간,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 어셈블!"을 외친다.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 기댈 곳은 우리들 자신이다.

마블이 창조한 세계는 마니아를 양산하며 새롭고 독특한 세계로 구축되어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작은 양자의 무질서가 중첩되어 움직인다. 마블의 세계는 실재 세계와 이러한 중첩을 꿈꾸며 만들어졌으며, 분명 그 의도는 성공했다. 이제 새롭게 펼쳐질 마블의 세계가 이러한 불안과 희망을 담아내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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