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양말 사랑' 대단하다

[서평] 구달 지음 '아무튼, 양말'

등록 2019.04.18 16:25수정 2019.04.1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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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좋은 글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다. 나 같은 건 글을 쓸 엄두조차 나지 않게 만드는 책이 있고, 이런 나도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고 글을 써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 있다.

나에게 전자는 선생님 같은 책이고, 후자는 친구 같은 책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방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하사하시지만, 친구는 언제나 손 닿는 곳에서 나를 위로해주고, 웃겨주고, 또 한 번씩 깨알 같은 지혜를 나눠준다. '아무튼 시리즈'가 나에게는 그런 친구 같은 책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내는,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다. 작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나게 쓴 글이다 보니, 읽는 이에게까지 그 기분 좋은 에너지가 전달되어 덩달아 신나게 읽게 된다.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문유석, <쾌락 독서>, 183쪽)
 
'아무튼 시리즈'는 2017년 9월부터 출간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18권이 출간되었다. 2017년에는 한국출판문화상도 수상했다. 나는 이 시리즈를 정말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무엇보다 손안에 쏙 들어오고, 코트 주머니에도 쏙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로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니기 좋기 때문이다.

둘째, 재미있다. 도서관 같은 데서는 읽기 곤란할 정도로 나를 웃겨준다. 그리고 셋째는, 읽다 보면 나도 무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너도 쓸 수 있어'라고 등을 토닥여주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막상 써보면 작가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마치 허허허 웃으며 슬슬 움직이는 것 같지만 단단한 내공으로 상대를 제압해버리는 무림의 고수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양말』구달 지음, 제철소(2018) ⓒ 박효정

 
<아무튼, 양말>의 저자 구달은 3년 차 프리 라이터, 9년 차 프리랜서 편집자, 19년 차 양말 애호가이다. '패션의 완성은 양말'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일개미 자서전>, <한 달의 길이>, <당신의 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공저)를 썼으며, 독립출판물 <블라디보스토크, 하라쇼>, <고독한 외식가> 등을 쓰고 그렸다.

'양말을 좋아한다, 양말로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좋아한다'는 저자는 출판사에서 의뢰가 들어오기도 전에 출판사 쪽에 '<아무튼, 양말>을 꼭 쓰고 싶다'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만큼 양말 사랑이 대단한데, 양말을 좋아하는 이유, 양말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다가 울다가 또 웃게 한다.
 
내게 양말은 이런 의미다. 예쁜 양말을 골라 신는 것만으로 평범한 일상이 단숨에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 양말 서랍장에는 빨주노초파남보 펄 레이스 벨벳 시스루 꽃 별 구름 땡땡이 가로줄무늬 세로줄무늬 지그재그까지 다양한 색상과 독특한 소재, 아름다운 패턴으로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물들여줄 양말이 88켤레나 있다. (34쪽)

양말처럼 저렴하고 작은 것이지만 볼 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 좀처럼 웃을 일 없는 일상에 작은 기쁨 하나 더하는 것만큼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작고 예쁜 병에 담긴 매니큐어를 하나씩 살 수도 있고, 아기자기 귀여운 스티커를 한 장씩 살 수도 있고, 매끈한 연필을 한 자루씩 살 수도 있겠다.

나도 예전에는 스티커를 꽤 사서 모아두며 흐뭇했다. 지금은 예쁜 색깔의 접착식 북마크와 마스킹테이프를 하나씩 사며 혼자 즐거워하며 살고 있다. 남들에게는 하찮아 보이겠지만 단 돈 몇 천 원으로 이렇게 나의 기분을 확실하게 좋게 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희사에서는 과감한 색깔과 현란한 무늬의 양말을 신지 못하지만 발등에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양말을 신으며 힘들고 지칠 때 발등을 한 번씩 내려다보며 위로받는다는 부분에서는 나도 당장 나가 내가 좋아하는 보노보노가 그려져 있는 양말을 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느새 저자의 양말 예찬론에 설득 당해버린 것이다. 
 
영양가 없는 회의가 엿가락처럼 늘어질 때면 슬쩍 삼선 슬리퍼를 벗고 발등에 그려진 얼굴을 감상하곤 했다. 귀여운 스티치, 엉뚱한 보노보노, 푸근한 푸, 엽기적인 짱구, 매일매일 주인공을 바꿔 가며 발등에서 상영되는 캐릭터 양말 만화동산. 어릴 적에 텔레비전 앞에서 그랬듯이 귀여운 친구들과 눈을 맞추면 즉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귀여운 무생물이 최고야. 날 배신하지도 않고, 일을 떠넘기지도 않고, 회의를 질질 끌지도 않잖아. (74쪽)

양말을 보면서, 양말을 선물해준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예쁜 양말을 샀던 장소를 추억하고, 양말의 소재에 따라 계절을 느끼는 저자의 일상이 꽤 괜찮아 보인다. 그러다가 양말 세탁을 직접 하면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다. 나도 결혼 전에는 스스로 세탁기 한번 돌린 적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직접 빨래를 하면서 엄마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양말을 빨았다. 4인 1견 가정에서 매주 신고 벗는 양말은 최소 28켤레다. 거기에 운동하느라 갈아 신고, 외출한다고 바꿔 신는 양말까지 포함하면 대략 35켤레가 매주 세탁기로 직행한다. 처음 세어보았을 때는 생각 없이 벗어던지는 양말이 생각보다 많다는 데 깜짝 놀랐다. 나만 지네인 줄 알았는데, 온 식구가 다 지네였다. 다들 분주하게 두 발을 움직이며 살고 있었다. (133~134쪽)

이유 없이 우울할 때,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아플 때, 고된 밥벌이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을 때, 나를 기쁘게 하는 작고 예쁜 것들을 하나 사는 것. 내 눈앞에 고운 자태를 뽐내며 놓여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을 보며 오늘은 어느 것을 살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에게서 위로를 받는 일도 참 귀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한 뼘 더 성장하는 것 아닐까.
 
외출이 즐겁다. 오로지 양말을 사기 위한 목적만으로 나선 외출이 즐겁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미뤄둔 밥벌이를 재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별것 아닌 일로 잠깐이나마 외출을 감행하니 세상 행복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싶진 않다. 제철 양말을 고르는 티끌만 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행복은 양말이다. 양말과 함께라면 행복은 언제나 제철이다. (158~159쪽)

아무튼, 양말 - 양말이 88켤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구달 지음,
제철소, 2018


#아무튼양말 #구달 #제철소 #아무튼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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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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