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꿇고 사느니' 김상진열사 자결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69회] 그의 순절은 꺼져가던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새로운 횃불이 되었다

등록 2019.04.11 16:28수정 2019.04.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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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가족들(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한민족은 외우내환 때이면 어김없이 자기 몸을 던져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의ㆍ열사의 전통이 연면하게 전해왔다. 구한말 민영환ㆍ황현으로부터 일제침략기 장인환ㆍ전명근ㆍ안중근ㆍ박재혁ㆍ이봉창ㆍ윤봉길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박정희의 폭압통치에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전태일이 몸을 불살랐다면, 유신체제를 타도하고 학생들의 의기를 살리고자 김상진이 할복하였다. 항일 자주독립 과정에서 전개된 의ㆍ열사들의 전통은 민주회복과 통일조국을 위해 학생ㆍ노동자들의 할복ㆍ분신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75년 들어 유신체제 '찬반에 대한 국민투표'라는 이름과는 달리 일방적인 찬성운동 끝에 73%의 찬성이라는 억지를 부리고, 자유언론 선언을 주도한 〈동아일보〉 기자들을 폭력으로 끌어내어 해고시키고,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한데 이어 인혁당사건을 날조하여 무고한 8명을 재심의 기회도 주지 않고 전격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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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해산당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 회사와의 투쟁에 들어갔다. ⓒ 월간 <말>

이같이 계속되는 폭압 통치에도 저항세력은 움츠려들지 않았고, 민주회복운동의 전위 역할을 해온 대학생들은 반유신 항쟁으로 많은 학생들이 투옥되거나 제적당하면서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면면한 학생운동의 전통이었다.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된 것은 75년 4월 7일이다. 대학가 신학기를 겨냥한 '예방조치적' 성격이 짙었다. 새봄을 맞아 대학가는 더욱 활기차게 움직였다. 3월 28일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선언문을 잇따라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학생회장 황연수 군 등을 구속했다.

서울농대생들은 4월 2일 박정희 정권에 맞서 학원과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어 4일에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학원자유 보장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11일 학내에서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단식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11일 오전 11시경, 이날 농대 대강당 잔디밭에는 3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구속학생 문제가 잘 해결될 것 같으니 성토대회나 가두시위는 삼가주기 바란다"는 학장의 통고와 월요일까지 탄식 연기를 합의한 과대표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당최 학교 당국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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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추억-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 영화 스틸 ⓒ M2픽처스

 
11시 20분경, 축산과 4학년 김상진 군이 연단에 올랐다. 이날 집회의 세번 째 연사였다. 신사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김군은 차분한 어조로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학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의 끝날 때까지 후퇴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그러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 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파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 선 내 영혼이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 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양심선언문> 을 차분하게 읽어가던 김상진 군은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부분을 읽을 때 등산용 칼을 꺼내어 학우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하복부를 찔렀다. 그리고 선혈을 뿌리면서 연단에 쓰러졌다.

학우들이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옮길 때 김군은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애국가를 들으며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수원 도립병원에서 하복부의 혈관을 잇는 봉합수술에 이어 2차 수술을 받고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튿날 아침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앰블런스 속에서 절명했다.

김상진 열사는 <양심선언문>과 별도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다. 박정희의 폭압 통치를 낱낱이 규탄한 이 유서는 박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했다.

"죽음으로써 바라옵나이다.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국민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길 바라옵니다."

박정희 정권이 가장 두려운 집단은 대학이었다.
군부는 오래 전부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통해 관리를 해왔고, 언론과 야당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했다. 남은곳이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김 열사의 시신도 두려웠다. 정부는 김 열사의 시신을 12일 저녁 8시경 고양군 벽제 화장터에서 서둘러 화장하였다. 법률상 24시간을 넘기지 않은 시신은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도 무시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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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200여 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가 열렸다. ⓒ 월간 <말>

김군의 할복 자결 소식은 언론통제로 보도가 금지되었으나 〈동아일보〉만 송건호 편집국장의 지시로 1단 기사로나마 실릴 수 있었다. 1단 기사의 위력은 대단하여 추모하는 집회가 진주ㆍ대구ㆍ목포 등지에서 열리고 서울대를 중심으로 각종 문화행사와 추모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학가는 긴급조치 7호 선포에도 불구하고 더욱 거세게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 재야 단체들이 그를 의사 혹은 열사로 추앙하면서 추모 행사를 벌였다. 그의 순절은 꺼져가던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새로운 횃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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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과 긴급조치 7호 발동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세력은 사건관련자들에게 사형등 중형을 선고한 이후 바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시킨다. ⓒ 공개사진

김정환 시인의 김상진 열사 추모시의 앞 부문이다.

 겨울의 대지 살점 묻은 바람 계엄령 조국
 4월도 노란 개나리 5월도 빨간 철쭉꽃 겁 없이 피고지고
 부릅 뜬 눈 덮쳐온 고향 풀밭 아아 어머니  흩어지는 하늘에
 갈아라 그대 서슬푸른 칼을 갈아라
 그대가 가르고 또 가른 한낱 육신의 배때기는
 하얀  광목폭 깃발 찢어져 휘날림
 핏빛 푸르디푸른 하늘과 산과 바다
 주린 목숨에 갈아라 떨리는 두려움에 갈아라. (후략)

 
#김상진열사 #김상진 #긴급조치7호 #송건호 #김상진_양심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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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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