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참가한 최시형 아들... 대 이어 독립운동한 가문

동학농민혁명 토대 마련한 최시형, 3.1운동으로 옥고 치른 최동호... 불멸의 애국지사들

등록 2019.02.25 18:02수정 2019.02.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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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백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필자는 동학 지도자 최시형(1827∼1898)을 연구하던 중에 그의 아들인 최동호(崔東昊, 1897∼1923)가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됐다.

최동호의 재판 판결문과 서대문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이 아니어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최동호는 1897년 9월 14일 아버지 최시형과 어머니 손소사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동호의 형으로 최동희(1890∼1927)가 있었다.

아버지 최시형은 1898년에 관군에 체포,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어머니 손소사는 손병희의 여동생이었다. 최시형이 처형되기 1년 전에 최동호는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어서 최시형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모습 최시형 선생 모습 ⓒ 박용규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35년간 삼남지방뿐만 아니라 강원, 경기, 황해, 평안도까지 돌아다니며 교단을 조직하고 인간평등 사상을 전파했다. 1894년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농민전쟁의 토대를 그가 마련했다.

같은 해 9월 18일,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항일전에 나서라'며 통령기를 주었고 기포령을 내렸다. 그도 2차 동학농민전쟁에 직접 참가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무력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결국 패배했다.

최시형은 1895년 7월에 손병희에게 "후일을 준비하라"라고 당부했다. '외세, 즉 일본을 척결하는 일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1919년에 제2의 동학농민혁명인 3·1운동(삼일혁명)을 주도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천도교인이었는데, 그 15명 가운데 9명(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때도 동학농민군 3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들이 신분제를 타파하여 근대사회를 열었다. 이후 다시 동학교도(천도교도)들이 3·1혁명을 주도했다. 때문에 많은 천도교인들이 일제로부터 학살 당했다. 3·1혁명의 뿌리는 동학농민혁명에 있었다.

독립선언서 나눠주고 '만세' 외친 최동호
 

최시형 선생 순교터 서울 종로구 단성사 근처에 있다. ⓒ 박용규


큰외삼촌이 되는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가 최동호 집안을 보살펴주었다. 최동호는 17세에 천도교의 간부인 오지영의 장녀 오순엽과 결혼했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외숙부가 되는 손병희는 3·1운동을 주도했고, 손병희의 조카가 되는 최동호는 23세에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당시 서울 종로 가회동 79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오전에 최동호의 어머니와 형수, 최동호 본인과 처는 전날 보성사에서 이종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500매를 종로와 용산 일대에 배포하기 위해 맡은 구역으로 갔다. 최동호는 용산 일대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이후 시위 군중이 서울 남대문 조선은행 앞에 모여 있을 때, 그도 함께 참가해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일에 일제는 손병희 집과 최동호 집을 포위하고 수색했다. 각종 서류를 가져갔고, 가족 대표로 최동호를 체포했다. 경찰은 경무총감부로 그를 데려가 손병희와의 관계나 33인의 독립선언에 대해 알았는지 추궁했다. 최동호는 20여 일 고초를 겪은 뒤에 훈방됐다.

최동호의 독립 투쟁은 꺾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는 1919년 5월 20일 만주에서 독립운동전선에 먼저 뛰어든 형 최동희의 지시를 받고 서울에 돌아온 홍일창을 만났다. 홍일창은 천도교 의사원으로 있었다. 홍일창의 아버지는 동학혁명 때 참가한 접주 홍종식이었다.

같은 해 5월 24일에 홍일창이 최동호에게 '조선독립에 필요한 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해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말하자, 최동호는 '경성부 수송동에 거주하는 자신의 장인인 오지영이 천도교의 자금 4∼5천 원을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 돈을 탈취하자'고 말했다. 천도교 자금은 공금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받아낼 수 없어 '탈취'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최동호는 '일본인 형사로 위장해 돈을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며, 과거 정창수에게 받아 보관하고 있던 9연발 권총에 총알 9발을 장전한 채로 동지 최욱에게 건네주었다. 최동호는 '일본 옷을 착용하지 않고는 (일을)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일본 헌병대에서 조선인 통역을 해 주고 있는 여보현이 적당하겠다'고 덧붙였다. 최욱이 신의주까지 가서 안동현에 있는 여보현을 부르고, 여보현이 오면 오지영의 돈을 탈취할 계획이었다.

최동호·홍일창·최욱 3인은 조선독립자금을 모집한 후,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5월 26일 밤 최욱이 경성을 출발해 여보현과 이만형을 신의주에서 데려왔다. 같은 달 28일 아침, 이들은 함께 경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5월 27일에 이 일이 발각됐다. 최동호는 홍일창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 종로경찰서에 수감됐다. 다음 날 최욱도 체포됐다. 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사건'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한 채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는 8명이었다.

"조선 독립을 희망해서 소리 질렀다"
 

최동호 판결문 경성지방법원(1920. 10. 26) 최동호 판결문 ⓒ 박용규


특히 최동호는 권총을 소지하고 이를 동지에게 건네주었기에,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혹독하게 당했다.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도, 그는 당당하게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조선이 독립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1919년 6월 27일 경성검사국에서 일본인 검사에게 신문을 받았다. 다음은 신문 내용이다.

일본인 검사 : "그대는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가?"
최동호 : "딱히 독립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독립을 희망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최동호 검사 신문조서」, <3·1독립운동>4권,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편, 원서방, 1984, 192쪽.)


이후 1920년 2월 27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일본인 판사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

일본인 판사 : "피고는 1919년 3월 1일에 군중이 경성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시위운동 때에 참가했나?"
최동호 : "당일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과 함께 한강 철교를 구경하려고 전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오후 2시 반경 조선은행을 약간 지나친 곳에 다다랐다. 이때 종로 방면에서 군중이 만세를 부르면서 왔기에 전차는 멈추었다. 그래서 전차에서 내린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나는 별도로 집에 돌아왔고, 군중은 남대문 방면으로 나아갔다."
판사 : "그때 피고는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는가?"
최동호 : "2, 3회 만세를 불렀다."
판사 : "군중은 독립을 희망해서 만세를 불렀는가?"
최동호 :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만세라고 부른 것은 조선독립을 희망해서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한다."
판사 : "피고도 조선 독립을 희망해서 그때 만세를 불렀는가?"
최동호 : "그렇다."
판사 : "만세를 부르면 왜 조선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느냐?"
최동호 : "나는 영문도 모르고 모두가 만세를 불렀기에, 그들을 응원할 생각으로 따라 불렀다."
판사 : "만세를 불러서 시끄럽게 하면,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이 승인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최동호 : "그렇게까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동호 지방법원 예심 신문(訊問)조서」, <3·1독립운동>4권,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편, 원서방, 1984, 341쪽.)


이상과 같이 최동호는 1919년 3월 1일에 '조선 독립을 희망해서 만세를 불렀다'고 당당히 밝혔다.

최동호는 1920년 10월 26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홍일창은 징역 3년형을, 최욱은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찍은 최동호의 모습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최시형의 아들로,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최동호는 1921년 11월 2일에 출옥했다. 종로경찰서 유치장 구속기간까지 합쳐 총 2년 5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이후 그는 활기찬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물고문의 후유증은 너무도 컸다. 물고문을 받게 되면 폐에 물이 차게 되어 폐질환으로 이어지는데, 그에게 폐결핵이 찾아왔다.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의 부인이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살려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일제 경찰이 자행한 고문이 그의 생명을 빼앗아간 것이다. 일제 형사들은 독립운동가를 물고문 하면서 "물을 먹으면 저승에 가고, 저승에 못 가면 폐병에 걸린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최동호는 외숙부 손병희가 서거한 상춘원에서 1923년 5월 21일에 별세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뒤를 이어 그의 형 최동희도 1927년 1월 26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서거했다. 최동희는 1922년 7월에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서 활동했고, 1926년 4월 5일에는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 활약한 혁혁한 항일투사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최동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최동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최동희·최동호의 아버지 최시형도 일본군과 싸운 항일투사였다. 최시형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인사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는 조치를 단행하기를 바란다. 최시형·최동희·최동호는 대를 이어 나온 불멸의 애국지사다.

참고문헌 : 「최동호 판결문 경성지방법원(1920. 10. 26)」(국가기록원 소장).
최정간,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 웅진출판, 1994.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최동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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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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