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폭살 미수 박열의 도쿄재판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12회] 박열의 사상적 근저를 이룬 것은 조국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였다

등록 2019.02.13 17:49수정 2019.02.13 17:49
0
원고료로 응원
 

박열 의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조선침략과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 부자를 처단하려다 '대역사건'이란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되어, 일수로 8,091일, 연력으로 22년 2개월 1일 동안 혹독한 일제 감옥생활을 견디고 출옥한 '운명의 승리자'가 있다.

당시 세계 감옥사에서 '하나의 죄'로 햇수로 23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르고 살아남은 혁명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는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해방 후 생환하였다. 단순히 그가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그리고 6ㆍ25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행적때문에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그동안 아나키즘을 반체제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부해왔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모든 제도와 권력을 부정하는 이념으로 오해된 것이다.

식민지의 청년 박열에게 아나키즘은 일제 강권주의를 대체하는 구원의 이념이었다. 일본 아나키즘의 거두 오스키 사카에와 교유했으며, 강권주의의 상징인 일본 왕을 처단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박열의 사상적 근저를 이룬 것은 조국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였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상극의 관계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배격했고 해방 후에도 이승만의 정부수립을 지원했다. 박열이 체포되기 전 도쿄에서 김약수, 조봉암 등과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이탈하여 따로 '흑우회'를 조직한 것도 흑도회의 사회주의적 경향성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기피되어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복권' 되었다.  

박열은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샘골에서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합격한다.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는 이 학교에서 박열은 우수한 성적을 보이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던 차에, 사상이 건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3학년 때 퇴학당했다.


1919년 3ㆍ1혁명이 일어나자 시위에 나선 것은 물론,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퇴학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박열은 18세가 되던 1919년 10월 도쿄로 건너갔다. 감시와 고문이 심한 국내보다 국외가 압박이 적겠다고 판단, 사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결행한 것이다.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신문배달부, 식당종업원, 막노동꾼, 우체부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녔다. 1921년부터 정태성ㆍ김천해 등과 더불어 기존의 친목단체 '노동동지회'를 '재일조선인 고학생동지회'로 개편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일본사회주의동맹'의 창립을 전후하여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새로운 사상운동에 합류하면서 박열은 김약수 등과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 이와사 사쿠타로와 만나면서 이들로부터 인생관ㆍ사회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19년 3.1혁명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 한국 고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흑도회'가 창립되었다. 흑도회는 민족적 사회운동 단체로서 1923년 2월에 이름을 '흑우회'로 바꾸고 활동했다. 당시 박열은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흑우회'의 기관지 발행과 비밀결사 조직인 '불령사'를 운영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박열과 함께한 가네코는 대단히 뛰어난 문필가로 학식이 높았다. 박열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설 기사 중 상당 부분이 그가 대필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를 전후하여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 17명이 일경에 검거되었다. 박열은 마침 조선의 고향집에 돌아와 있다가 구속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고 다른 불령사 회원들은 대부분 일본 현지에서 붙잡혔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기 직전 일본 관헌은 급진적 사상과 사회단체를 일제 검속하면서 불령사 회원들도 구속했는데, 그나마 대지진의 와중에 학살 당하는 참변을 모면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본 정부는 불령사를 과격한 반체제 단체로 규정하고, 특히 박열과 가네코 등이 왕세자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져서 일왕 부자와 일본 정부 고관을 암살하려 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동조자 김중한이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통해 폭탄을 구입해 오려 했고, 그 비용은 흑우회가 기관지 <현사회>의 광고료로 충당하려 했다는 사실도 발표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主婦之友》 1926년 3월호 ⓒ 이윤옥

이 사건으로 조선인 청년 혁명가와 일본인 여성의 사랑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의 공범이 일본 여성이라는 점에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열은 1925년 9월 일본 대심원 특별법정의 공판에 앞서 네 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으로서 일본 법정에서 박열처럼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편 사람도 흔치 않았다. 한국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일본에 알리는, 일본 재판사상 전무후무한 내용이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법정 사진을 보도한 신문 기사. 이 사진으로 판사는 사직했고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 국가보훈처 제공

첫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너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인 이상,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이다. 천황을 대표하는 일본의 재판관이 법관을 쓰고 법의를 입는다면, 나도 조선의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을 쓰고 조선의 왕의를 입는 것을 허가할 것.

둘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조국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탄핵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나의 질문에 답변하라. 즉 내가 법정에 서는 취지를 내가 선언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셋째, 나 박열은 일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로 말하도록 해 달라. 조선어로 말할 터이니 통역을 준비할 것. 

넷째, 일본의 법정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한다고 해서 재판관은 높은 곳에 앉고, 일본의 천황에게 재판받는 나 박열은 낮은 곳에 앉는 터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일반 피고와는 다른 사람이다. 때문에 내 좌석을 너희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어 달라.

박열이 요구한 4가지 조건에 대해 대심원 심판부에서는 여러 날 동안 숙의한 결과 첫째와 둘째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나키스트 박열 ⓒ 최홍대

이로써 박열은 변호사가 한국에서 구해온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일본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장은 또 '피고'라는 용어 대신 '그대' 라고 호칭했다. 

1926년 2월 27일 오하라 검사는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박열의 최후진술과 변호사의 변론을 거쳐 3월 25일 두 사람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의 사형 선고가 끝나는 순간 가네코는 소리를 높여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 라고 인사할 만큼 여유를 보이면서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려거든 죽이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 라고 신랄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네코도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고 내뱉으며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히 여긴다"라고 말했다. 

일본정부는 이들에게 무기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이치가야형무소의 아키야마 소장은 "특전으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라며 특사 명령을 낭독하고 박열에게 특사장을 수여했다. 박열은 '흥'하고 냉소하며 받았다. 소장은 남은 한 장을 가네코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소장의 행동을 지켜보던 가네코는 특사장을 손에 넣는 순간 조각조각 찢어버렸다. 기겁을 한 형무소장은 직원들에게 입단속을 시키고, 두 사람이 감사하게 감형을 받아들였다고 언론에 밝혔다.
 

박열 부부의 의거를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1925년 11월 25일). 검찰의 사형 구형을 전하고 있다. ⓒ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박열은 자바형무소로, 가네코는 우쓰노미야 여자형무소로 옮겨져 무기수형으로 복역했다. 그러던 중 7월 23일 가네코는 옥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사이다. 박열은 사랑하던 아내이자 동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은 채 몇 차례 감옥을 옮기며 23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가 패망하자 1945년 10월 27일 박열은 복역 중이던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따른 것이다. 

박열이 조국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 행사 자리였다. 그는 "조국독립이 나의 염원이요, 조국통일이 나의 전부이다"라며 통일정부 수립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 뒤 장충동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당시 서울에는 재혼한 부인 장의숙과 아들 영일, 딸 경희 두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다시 남한의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74년 1월 18일이다.

국내 신문 한 귀퉁이에 짤막한 1단짜리 기사로 박열이 1월 17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부음이 실렸다. 일본에서 수신된 평양 쪽 발표는 그를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회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열 #가네코후미코 #박열_도쿄재판 #불령사 #박열_4가지조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우리말의 감칠맛>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