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회]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옹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사기를 압도해"

등록 2019.02.09 17:41수정 2019.02.0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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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부대 ⓒ 독립기념관

청산리는 만주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데,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사는 용정촌에서 약 1백 여 리 떨어져 있다. 주위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첩산이므로 우리 교민들이 청산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근에는 충신장(忠信場)이라는 중국인 마을(200호 정도)이 있고, 충신장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대립자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15리 쯤 가면 백운평이 있다.

충신장에서 백운평까지의 장장 60리의 깊은 계곡은 전략적으로 먼저 진을 치는 편이 유리하게끔 되어 있었다. 우리 독립군이 청산리를 결전지로 정하고, 이곳에서 일대 섬멸전을 펴자는 것도 그러한 전술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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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부흥향에있었던 청산리전적 나무비 ⓒ 박도

일제는 한국독립군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한편 자체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군이 한국 독립군 진압에 형식적일 뿐, 아무런 전과도 이루지 못한 것을 알고는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음모는 이른바 '훈춘사건'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음모를 진행하기 위해 1920년 10월 11일 "조선군사령관이 만주침입 일본군사령관(제19사단장)에게 훈춘 간도지방에 있는 제국 신민을 보호하고, 아울러 그 지방의 불령선인 및 거기 가담한 마적 기타 세력을 초토화 할 것"과 파견부대 등을 명시하는 명령을 내렸다.

일제는 1920년 10월 2일 마적의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여 마적 400여 명으로 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케 하였다. 이 습격으로 시부아 경부의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일본영사관 보호와 마적토벌이라는 구실 아래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제19사단의 병력을 불법으로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촌에 2001년에 세워진 기념비. 기념비문에는 “청산리 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연변 지역 각 민족 인민이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위업을 천추 만대에 전한다”라고 쓰여있다. 사진은 2018 창의융합인문학 기행단이 2018년 8월 참배하고 있는 모습. ⓒ 이정희

봉오동 참패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간도출병의 명분을 위한 처사였다. 이어서 10월 14일에는 중국에 공개적으로 간도출병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훈춘에서만 조선인 교포 240여 명이 학살되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이 파괴되었다. 또 일제의 반공개적인 만주지역 교포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일제가 간도에 파병한 병력은 각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천여 명 규모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임무는 한국독립군을 학살하는 일이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명월구와 이청배 지역의 독립군 기지를 떠나 8월 중순경에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일대로 옮겨 남완록구와 북완록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군사기지를 구축했으며, 그 뒤를 이어 안무의 대한국민회군과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등 반일무장단체들이 차례로 이곳에 도착하여 홍범도 부대와 합세함으로써 강력한 연합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위치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러시아로 파견한 무기구입부대가 돌아오지 않아 근거지 이동을 미루고 있었다. 결국 9월 6일 맹부덕이 거느린 중국군이 십리평으로 들어와 근거지 이동을 요구하자, 9월 9일 급히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거행하고 부대를 재편성한 후 17~18일에 장정길에 올랐다. 그후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한 달간의 힘겨운 행군을 거쳐 10월 중순경에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 도착했다.

당시 청산리와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대한독립군(약 300명), 국민회군(약 250명), 대한신민단(약 200명), 의군부(약 60명), 의민단(약 100명), 한민회단(약 200명) 등 모두 1,200여 명에 이르렀다.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허룽시에 있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의 부조. ⓒ 안홍기

5개 부대 대표들은 10월 13일 이도구 복합마당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하나의 독립군연합부대를 편성하며, 군사행동을 통일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기로 군사통일과 함께 전략을 짰다.

22일 오전 7시 20분, 어랑촌에 본부를 설치한 일본군 아즈마 소좌는 주력부대인 예비대를 남완투구로, 그리고 21일 남양촌에 숙영하고 있던 아미노 부대를 북완루구로 각각 출동시켜 양측으로 홍범도 부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천리봉에 지휘부를 설치한 홍범도는 일본군의 음모를 미리 간파하고 독립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널푼골 남쪽과 북쪽 골짜기에 매복시킨 채 일본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남ㆍ북 양측의 최전선에서 일본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계획했던 작전대로 양측의 일본군을 향해 동시에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서서히 널푼골로 퇴각하는 척하다가 천리봉 남쪽 기슭으로 신속히 빠져나갔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양측에서 협공해오던 일본군은 널푼골에 들어서자 서로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저희들끼리 한바탕 총격전을 벌였다.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던 일본군은 오히려 홍범도의 탁월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결국 자멸전을 벌이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연합부대는 일본군 약 400여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어랑촌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참패하였다. 기병연대장을 비롯하여 400여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가 1,000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1921년 1월 15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청산리 전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독립군의 전승(全勝) 이유

①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옹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사기를 압도한 것.

②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히 준비를 하여 사격 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③ 임기응수변의 전술과 예민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청산리 대첩은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정리하면 ①백운평 전투 ②완루구 전투 ③천수평 전투 ④어량촌 전투 ⑤맹개골 전투 ⑥쉬구 전투 ⑦만기구 전투 ⑧천보산 전투 ⑨고동하 골짜기 전투 등이다. 독립군은 10전 10승을 이루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26일 새벽까지 꼬박 6일 동안 밤낮으로 추위와 기아 속에서 전개되었다. 봉오동전투 때와는 달리 날씨는 맑은 편이었으나, 이 지역 10월 하순은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등 대단히 추운 계절이었다.

청산리 전쟁은 국치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대첩이었다. 독립군 중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군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지만, 다수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이다. 반면에 적군은 일본 정규군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최강의 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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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했던 소총과 탄약 ⓒ 독립기념관

상하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통칭 '청산리 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를 약 1,200명이라고 추산하고, 중국신문 <요동일일신문>은 약 2천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도 일본군 전사자가 약 2천 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독립군의 희생도 없지 않았다.

사망 1인, 상이 5인, 포로 2인.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병, 기병총 31병, 탄약 5천발, 군도 5개, 나팔 3척, 마안(馬鞍) 31차, 군용지도 4부, 완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모포ㆍ휴대천막, 군대수첩 등속 약간.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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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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