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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배우들로 무한 공감 끌어낸, 한 영화감독의 '마법'

[리뷰] 시집을 장편영화로... 표현력 돋보이는 <도쿄의 밤하늘은...>

19.02.07 17:08최종업데이트19.02.0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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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는 일찍 퇴근한 동료가 홀로 있는 걸 발견하고 걱정한다. ⓒ 디오시네마

 
사람은 각각 외로운 개별자다. 거대한 도시 안에서 일상에 매몰되고, 타성에 젖어 익명의 평범한 개인으로 살아간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직업'이라는 양태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 편입된다. 생존에 알맞은 직업을 갖고 있으면 보다 쉽게 인간 무리 안에 섞여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젊은 나이라도 인간 무리에서 밀려난다. 이러한 냉혹한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거나 감정을 나누지 못하고 파편화된 개인으로 생존해 나간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인구 1300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 도쿄에서 살아가는 청춘을 조명한다. 도쿄도 서울처럼 지방민이 올라와 사는 도시라고 한다. 전출자보다 전입자가 많기에 우리의 서울처럼 끊임없이 팽창하는 도시다. 한마디로 생존 경쟁이 극심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별다른 연고 없이 적절히 뿌리내리긴 쉽지 않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인 신지(이케마츠 소스케)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는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홀로 거주하는 이들이다. 

신지는 건축 공사장에서 자재 나르는 일을 하는 일용직 잡부다. "너 학교 다닐 때 머리가 좋았잖아. 그런데 그런 일을 해?"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이 그에게 물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이런 놈이기 때문이지." 그가 무심하게 답했다.

미카는 낮엔 대형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밤엔 '걸스바'라고 불리는 술집에서 일한다. 간호사라면 괜찮은 연봉을 받을 텐데 왜 미카가 밤낮으로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인지 관객은 의문을 갖게 된다(이 의문은 영화 중반이 넘어서야 풀린다).
 

미카와 신지는 도쿄 밤거리에서 자주 마주친다. 신지의 시점으로 보이는 미카다. 화면의 절반을 암전 처리한 것은 신지의 신체적 결함과 관련이 있다. ⓒ 디오시네마

 
도쿄라는 큰 도시 안에서 이들은 자꾸 우연히 스치고 부딪힌다. 그렇게 남녀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사실 선명한 줄거리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뚜렷한 사건이 매 장면 일어나는 작품은 아니기에 종종 다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산만한 구성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또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고독이나 외로움, 의사소통의 부재 같은 것을 다룬 작품은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나름의 개성이 있다. 우선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가 그렇게 전형적이지 않다. 신지나 미카는 한마디로 비호감에 지질(?)한 캐릭터다. 이들은 마음속 불안 때문에 들어주는 이도 없는데 혼자 떠들기도 하고, 상대에게 호감이 있어도 말도 잘 붙이지 못할 만큼 소심하다. 심지어 이시이 유야 감독은 로맨스 장르에 어울리지 않게 외모까지 평범한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현실성을 높이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의 심리나 고민은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호감을 주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감정이입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 이 영화의 '자기소외' 혹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테마가 문화사에서 반복·변주돼 온 낯익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관객에 다가서는지, 그 주제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깊이 집중하는지에 따라 작품의 수준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내용'과 '형식'의 양면을 이끌어 나간다. 익숙하고 진부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자 하는 감독의 진심이 느껴진다.  
 

신지와 동료들이 다음 공사현장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 디오시네마

 
사랑은 20대의 특권이라고들 하지만 미카와 신지는 둘 다 사랑에 서툴다. 사랑보다 이 거대하고 냉정한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급한 젊은이들이다. 영화는 신지의 주변 인물 묘사에 공을 들이는데, 함께 공사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친구들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몸이 아픈 신지의 동료는 자신의 몸이 막일을 더 버텨내지 못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런 날이 오면 그땐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의 가슴 설레는 연애를 꿈꾼다. 

신지는 그런 동료를 보면서 마음을 쓴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세상의 자극에 마음을 닫고 무감해져야 하는데, 신지는 그러기엔 너무 다감한 사람이다. 미카에게도 나름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다. 신지에게 공사장 동료들이 있다면, 미카에겐 고향에 남겨진 무능한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다. 그녀의 상처는 가족과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사랑에 서툰 두 사람이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서로에게 다가가고 닫힌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여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간다. 이들에게 연애는 단순한 남녀의 애정사가 아니며,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과정임을 관객들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또 그제야 이런 세상에서 신지와 미카가 서로를 만났고, 또 서로 사랑할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느끼게 된다. 백 사람의 백 가지 감상이 있겠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기자는 그런 감상을 갖게 됐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티저 포스터. ⓒ 디오시네마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선지 영화 속엔 밤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담은 장면이나 밤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의 빌딩숲을 포착한 장면이 유난히 많다. 또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블루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 빌딩숲의 조명은 붉은빛을 간간이 썼다. 블루톤이 차갑고 우울한 느낌을 준다면, 붉은 조명은 온기를 주는 방식으로 대비시켰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영화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눈이나 입술의 클로즈업, 애니메이션의 활용, 화면의 절반을 암전(blackout) 처리하는 등 대담한 영상 연출도 눈에 띈다. 

미카의 내레이션도 시집을 원작으로 한 작품답게 영화에 격을 더한다. 이 영화는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하늘은 항상 최고 밀도의 푸른색이다>를 원작으로 했다.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흔하지만, 시집이 장편영화의 원작이 된 경우는 흔치 않다. 시를 모티브로 삼아서 2시간 분량의 장편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의 표현력과 상상력이 놀랍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이런 감성과 분위기의 작품을 좋아할 만한 관객이 국내에도 많을 것 같다. 영화는 2월 14일 개봉한다.  
 

미카와 신지가 밤사이 꽃이 핀 걸 보며 기뻐하고 있다. ⓒ 디오시네마

 
도쿄 밤하늘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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