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도에 태풍을 불러온 몽양 여운형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6회] 일제가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한 이유는?

등록 2019.02.07 17:23수정 2019.02.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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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 ⓒ 몽양기념관

중국에 망명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국내에 밀사를 보내 3ㆍ1혁명의 물꼬를 튼 여운형은 담대하고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다.

30대 초반에 이미 만고풍상을 겪어 온 터였다. 국제정세도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그리고 임시정부의 외교 역할을 담당하면서 외교라인, 외신을 통해 일본의 정세도 파악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3.1혁명이 일어나자 일제는 야만적인 수법으로 학살ㆍ방화ㆍ투옥으로 조선 천지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외국 선교사와 외신을 통해 만행이 전해지면서 일제는 국제여론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이른바 위장된 '문화정치'이고 유화책이었다.

일제가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였다. 자칫하면 그들의 선전용으로 이용될 위험 부담도 없지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 역할을 해온 행적이 저들의 정보망에 포착되어서, 자칫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무모함일 수도 있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여운형은 '불령선인의 수괴'급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하는 술책을 꾸몄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유화정책을 과시하고, 대내적으로는 그를 회유하여 식민지정책에 활용하며, 덤으로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시키려는 다목적용 카드였다.  

여운형은 일본행을 수락하기에 앞서 네가지 조건으로 신변보장, 언론과 행동의 자유, 통역은 장덕수, 귀로 조선 경유를 제시, 일제로부터 모두 수락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장덕수를 통역으로 제시한 것은, 그가 2월 20일 국내에서 활동 중에 일경에 검거되어 전라도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어서 이를 구해 줄 기회로 삼은 우정의 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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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야구팀과 함께 1926년 6월 15일, 여운형 선생이 코치로 있던 상하이 야구팀과 함께 찍은 사진. 선생은 기독교청년회 운동부장 시절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경기를 다녀왔고, 중국 금릉대학에서는 야구 대표 선수로 뽑혀 등록금을 면제받기도 했다. ⓒ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여운형은 1919년 11월 14일 상하이의 양수포산(楊樹浦山) 부두에서 일본우편선 카스가이루 편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최근우와 신상완이 수행하고 이를 주선한 후지타 목사가 동행했다. 


여운형의 도쿄 상륙은 태풍의 눈이었다.
초청인들이나 일본정부, 일본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본정부는 승용차 두 대를 일행에게 배치하여 이용케 하였다. 자동차가 극히 귀했던 시절이어서 일본정부의 파격적인 조처였다.  

여운형은 도쿄 도착 다음날 코가 척식부대신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공식일정'이 시작되었다. 코가는 여운형에게 극진하게 예우하면서 "이역에 살면서 고심참담한 조선의 우국지사들에 대해서는 성심으로 동정한다. 그러나 민족에게 실효있게 활동하시길 바란다"면서, 자신은 '일한합병'을 반대했다는 것과, 한국병탄을 회사들의 합병과 비유해서 "일한합병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이익"이라고 말하였다. 회유성 발언이었다.

만 34세의 여운형은 30년 연상으로 일본의 대심원검사, 판사와 치안본부장격인 경보국장(警保局長) 출신인 척식부대신을 상대로 그의 공관에서 명쾌한 논리로, 일제의 한국 병탄이 동양평화를 어지럽게 한다고 논박하였다.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배일론이 아닌 논리적인 주장이었다. 

여운형은 코가의 안내로 아카사카리궁을 참관했다. 일본 황실의 '리궁'은 일왕이 국빈이나 귀빈을 알현할 때나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사용되는 별궁이었다. 여운형 일행의 '리궁' 참관을 두고 내각의 반대측에서 거센 비판이 일었다. '불령선인'들이 성역인 황실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맹비난하였다.

여운형 일행은 일본의 각계 요인들과 접촉하였다. 19일부터 2주일 동안 면회, 면담한 사람은 코가 척식부대신, 다나카 육군대신, 도코나미 외무대신, 미즈노 조선총독부정무총감, 노다 체신대신, 하라 수상, 일본기독교 요인들, 요시노 사쿠조 도쿄제국대학 교수 등이었다

여운형의 일본방문 하이라이트는 11월 27일 테이코쿠호텔의 회견이었다. 도쿄중심가에 자리잡은 데이코쿠호텔에는 일본 각계 인사, 신문기자 등 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전날까지의 활동이 일본 신문에 전혀 보도되지 않는 것을 여운형이 코가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변한 현상이었다. 

여운형의 항의를 받은 일본정부가 태도를 바꾸어 보도 통제를 해제, 27일 테이코쿠호텔에서 여운형의 강연과 회견이 있음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도쿄의 한국유학생 등 많은 사람이 몰려온 것이다. 여운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만장한 청중 앞에 섰다. 소시적부터 연설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연설과 회견은 간결하지만 청중을 사로잡았다. 

한일합병은 순전히 일본의 이익만을 위해 강제된 치욕적 유물이다. 일본은 자신을 수호하고 상호안전을 위해서 부득이 합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러시아가 물러간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러한 궤변을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한국의 독립은 일본에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즉 일본은 조선독립을 승인하고 조력함으로써만 조선인의 원한에서 풀리어 오히려 친구가 되고 중국과 그밖의 여러 이웃 나라와 나아가 전 세계의 불신과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동양의 평화와 세계평화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운형의 연설은 다음날 일본의 주요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보도관제가 풀렸기 때문이다.

신문에 따라 "조선의 청년지사 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 "제국 수도 한 켠에서 불온언사 난무", "여운형군 독립주의를 고집" 등의 제목을 뽑아 보도하였다. 일본 열도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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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서거 2달 전의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운형의 행보는 이어졌다. 일본 무단정치가의 대표로 꼽히는 다나까 기이찌(田中義一) 대장과의 회담은 여운형의 용기와 배포를 보여주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다나까 : 우리 일본은 천하무적한 육군이 수십만이고 대해를 휩쓴 팔팔(八八) 함대가 사해(四海)를 달리고 있다. 이런 천하막강의 군대와 한번 전쟁해 볼 용기가 있는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반항한다면 2천만 정도의 조선인들이야 일시에 없애버릴 수도 있다.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여운형 : 그대도 글을 읽는 사람이면 삼군(三軍)을 거느린 장수의 머리는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 (三軍之師可奪 匹夫之志不可奪)는 말의 참뜻을 알 것이다. 2천만 명을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목을 일순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여운형의 마음까지 벨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여운형이 지닌 철석 같은 조국애의 일편단심과 영원불변의 독립정신까지를 벨 수야 있겠는가?

호화롭기로 세계에 이름난 타이타닉호는 100분의 9밖에 안 보이는 빙산의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전부인 것으로 얕잡아 보았다. 그래서 돌진하다가 보이지 않는 물밑의 거대한 빙산에 부딪쳐 파선을 당했다. 그대들은 이와 같은 만용의 우(愚)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부른 3ㆍ1독립만세는 곧 물 위에 보인 빙산과 같을 따름이다. 전세계 인류가 사회정의와 인도주의를 따라 민족해방전선에 서서 깃발을 휘날리며 절규할 날도 머지 않았다. 그날 일본은 재기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여운형이 일본 순방 중에 파란을 일으켰던 연설 중의 하나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요시다 사쿠조오(吉野作造)가 초청한 신인회(新人會)의 초청에서였다.

요시다는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단체 신인회를 통해 여운형 환영대회를 열었다. 신인회는 신사상 특히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진보적인 학술단체로 이날 환영회 자리에는 사회사상가 모리타 다쓰오(도쿄대 교수), 사회주의운동가 야마카와 히로시, 아나키스트 선구자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사회주의운동가, 아나키스트 등 100여 명과 조선인으로는 김준연 등, 중국인도 다수 참석하였고, 수백 명의 도쿄대학생들도 참석하였다.

환영회 석상에서 여운형은 "조선독립운동은 조선인의 일시적인 감정 폭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조선인의 영구적 자유와 발전을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 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하였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행사 마지막 즈음에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까에(大彬榮)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참석자 다수가 합창한 것이다. 오스기(1885~1923)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처형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의 뒤를 이어 일본의 아나키즘을 지도하면서 천황제를 비판하는 등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다.

여운형은 일본열도에 폭풍을 휘몰아치고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유유히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가 떠나 온 뒤 일본 정계의 파고는 대단했다.

"조선가정부(임시정부)의 영수를 불러들여 불온 언사를 공공연히 자행하게 했다" 는 등의 여론이 빗발치고, 마침내 제4회 일본제국의회의 해산으로 하라 타카시(原敬) 수상이 이끈 정우회(政友會) 내각이 붕괴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여운형 #장덕수 #여운형의 일본방문 #정우회내각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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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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