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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 아기도 나처럼 짓밟힐 거예요" 11세 아이의 절규

[리뷰] 영화 <가버나움> 신의 은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19.01.28 13:55최종업데이트19.01.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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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난민 구호 모금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 속 인물이 영화 주인공이다. 하지만 인물은 영화에서 그저 불행한 모습으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롭게 비판하고 행동한다. 영화 <가버나움>에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열한 살인지, 열두 살인지 제 나이도 잘 모르는 어린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여동생의 남편을 칼로 찔러 소년원에 가게 된다. 살의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쉽게 자인을 비난하지 못한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약자들은 쉽게 자신을 잃는다. 사정을 안다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 어린 소년의 행동을 뉴스에서가 아니라, 영화에서 보게 되는 이유다. 

'자인'이라는 이름은 배우의 본명이다. 이 이름은 묘하게도 '후세인'과 발음이 비슷하다. 자인이 처음 집을 나섰을 때 버스에서 만난 스파이더맨 복장의 할아버지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슬람 시아파의 성인인 '후세인'이라는 이름에 담긴 비범한 이미지는 영화 내내 자인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자인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깡마른 십대 초반의 소년이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거대한 존재들이다. 깡마른 체구의 자인은 건장한 성인 남성 아사드(노울 엘 후세이니)를 찾아가 서슴지 않고 칼을 들이대고, 소년원에서 부모를 고소해 법정에 세우기까지 한다. 죄목은 '나를 태어나게 한 죄'다. 감독(나딘 라바키)은 직접 자인의 변호인으로 분해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자인의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다. 자인을 통한 영화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거대 담론은 신에게까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젖가슴을 빼앗긴 아이들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의 주연은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일찌감치 부모의 당연한 도움에서 소외되어있다. 자인의 집 아이들이 출생신고를 비롯한 법적 서류부터 학교 교육, 제대로 된 잠자리를 제공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엄마가 피우는 담배 연기를 그대로 마시는 갓난아기, 초경이 시작되자마자 팔리듯이 시집을 가야 하는 사하르(하이타 아이잠)가 받는 학대는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불법체류자인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이 자인에게 맡겨놓은 아기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에게는 모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요나스는 영화 내내 엄마의 젖가슴을 더듬어 찾는다. 절박한 상태로 버려진 채 애타게 엄마를 찾아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매정한 엄마는 신에 은유된다. 자인은 놀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동상의 젖가슴을 꺼낸다. 그러나 놀이기구는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한다. 등장인물 중에 놀이동산 앞에서 판매되는 '신의 작물' 옥수수를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무정해 보이는 신의 섭리를 영화에서 직접 증언하는 사람은 자인의 엄마다.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주신다며, 죽은 사하르 대신에 뱃속에 동생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자인 또한 부모의 모습과 신을 연결 짓는다.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를 고발하면서 함께 신을 언급하는 것이다. "저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신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요. 뱃속의 아이도 나처럼 될 거예요. 애를 그만 낳게 해 주세요." 무정한 엄마처럼 신은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돕지 않는다. 그래서 뱃속의 아이도,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레바논의 아이들도, 지구 상에 소외된 그와 같은 수많은 약자들도 똑같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자인의 입을 통해 역설하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신의 시점인 듯 베이루트의 빈민가를 상공에서 비춘다. 어디선가 보고 있지만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신, 자인은 그 신을 고발하듯 부모를 고발한다.
 
은총의 경계를 응시하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그러나 신의 대리인은 따로 있다. 영화가 말하고 있는 신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레바논의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 자인과 라힐이 갇힌 구치소에는 다양한 종교인의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무거운 배경음악과 함께 종교가 주는 위안의 바깥을 조명하려 한다.

악기를 들고 찾아온 한 무리의 종교인들과 수감자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에도 고통에 젖어있는 얼굴들, 한 곳을 향해 기도하는 무리 사이로 슬픔에 잠긴 얼굴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의 은총 바깥에 있다. 한 화면에 담긴 이 두 극명한 대비는 마치 가시화된 은총의 경계선처럼 보인다. 그 뚜렷한 구분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제목 '가버나움'의 역설이다. 

성서에서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베푼, '예수의 도시'다. 그러나 이 은총의 도시는 책망 끝에 멸망을 경험한다.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성서의 이 구절에서 가버나움은 의인화되어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은총을 이미 얻었으나 공의로운 신의 나라를 이루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이 책망받고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의 은총은 신의 나라, 즉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는 나라를 이루어야 할 책무와 함께 주어진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했던 예수의 가르침처럼 신의 나라가 이 땅에서 구현될 수 있다면 은총은 탈종교적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이때 자인이 갖지 못한 최소한의 권리는 곧 은총이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를 가르는 비정함, 그 경계가 선명할수록 가버나움의 책망은 무겁게 다가온다. 존재를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예언자와 같은 자인의 목소리가 새해 초 강력한 경종으로 울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사라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게시됩니다.
가버나움 칸영화제 나딘라바키 레바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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