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진실의 꼬리

[2018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진실11] 대단원 : 진실을 울리는 존재-최봉실 새들생명울배움터 대표

등록 2019.01.16 09:30수정 2019.01.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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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는 2014년 가을부터 매해 '교육(2014), 글쓰기(2015), 역사(2016), 마을(2017)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올해는 '진실'이란 주제로 함께 자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진실이 참으로 쉽게 외면되고 포기되고 심지어 '자포자기'되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스스로도 스스로의 진실을 모르는 일상은 비일비재합니다. 2018교육문화연구학교는 진실이 자포자기된 채 누려지는 우리의 삶과 자신, 관계는 과연 행복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우리 일상의 진실을 톺아보려 합니다. 기간은 11월 2일부터 2019년 1월 11일까지입니다. - 기자 말

한 러시아 사람이 있다. 러시아 사람인데, 러시아 정부의 부조리함과 거짓을 밝히려 했던 사람이다. 러시아 사람인데,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체첸 사람들의 고통을 주목하고 세간에 알리려 한 사람이다. 러시아 사람인데,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살해 협박을 받고, 그럼에도 풀려나 다시 제 신념대로 글을 쓰던 사람이다. 러시아 사람이며, 기자며, 두 아이의 엄마며,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이다. 안나 폴리코브스카야. 그녀는 2006년 피격되어 죽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이다. 용의자 세 명은, 무죄 혐의로 풀려났다.

"진실에 침묵하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 안나

지난 1월 11일, 2018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진실'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열심히 필기를 하던 사람들의 분란한 손이 멈추고 잠시 침묵을 가진다. 모두의 눈이 세미나를 진행하는 최봉실 새들생명울 배움터 대표와 그녀가 준비한 ppt에 집중했다. 기사를 작성하는 내 노트북 밑에 깔린 쿨러 팬 돌아가는 소리가 문득 크게 느껴진다. 잡음이 길어져 이내 그 공간에 무리 없이 녹아든다. 그 잡음이 침묵의 일부가 된다. 이 침묵은 익숙하다. 깊은 애도. 삼가는 마음. 그리고 분노다.
 

집중한 참가자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한 사람이 가장 일차적으로 지닐 수 있는 감정. 분노는 쉽고, 강하다. 안나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들, 뻔뻔한 러시아 정부의 행태, 불쌍한 체첸 사람들. 영웅담이 생겨나기 가장 좋은 조건 세 가지가 갖춰지고,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거기에 몇 가지를 더 얹는다면 공포나 좌절 따위겠다. 하지만 빠진 몇 가지를 더 얹는다 한들 거기에 분노가 빠지진 않을 것이다. 분노가 없는 그녀의 삶, 그녀의 진실은 없다. 이건 사실이다.

최 대표는 '진실을 울리는 존재'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강의를 하며 "우리 삶은 지금까지 이룬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고통당하는 이들이 있는 이상, 그들을 망각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더 나은 정의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책임을 한 사람, 소수의 사람만이 지기에는 그들에게 고통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그 짐을 같이 나눠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만족하기엔 이르다 말하는 최대표.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사뭇 조용하고 정갈한 마무리였다. 셀린디온의 'A new day has come'을 들으며 우아함도 가미했다. (한번 들어보라. 탁월한 단어 선택에 놀라게 될 것이다.)

참가자들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강의 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몸을 풀고 화장실에 가며 일제히 소리를 토해냈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 귤을 까먹는 소리, 잡담을 나누는 소리, 찌뿌둥한 몸을 푸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단숨에 공간을 메웠다. 쉬는 시간은 10분이었고 최 대표는 질문지를 나눠주며 쉬는 시간 동안 작성하자고 했다. 약속했던 10분이 다 가고, 쉬는 시간은 20분 추가되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을 즐기며 귤을 먹고 엄마는 감정을 추스려 글을 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진실을 울리는 존재'

질문지엔 달랑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최 대표는 소감이든 다짐이든 어떤 것이든 좋으니 마음껏 표현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로써 이 종이가 '질문'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참가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간 세미나에서 함께 나누었던 노래가 흘렀고 참가자들은 열심히 손을 놀렸다. 쉬는 시간 동안 잠시 흩어져 있던 감정을 다시 그러모아 쉬는 시간 30분을 꽉 채웠다.


"나는 어떤 진실을 원하는가 좋은 진실을 꿈꾸기 위해 마음을 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창조력이 있는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 정선영님의 소감
   

발표하는 정선영 님의 모습.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나눔을 듣는 동안, 참가자들의 정적을 분노로 보았던 유기성 없는 단편적 사고는 그들의 사고를 한정하는 또 다른 언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참가자들은 단순히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노는 쉽고 강하다. 편하고 싸다. 싸다는 게 늘 나쁜 건 아니지만 가끔 싼 게 비지떡일 때가 있다. 분노 좋다. 하지만 지속성과 방향성에 있어서 분노는 늘 물음표가 붙는다. 또한 가끔 분노는 그 사안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화풀이 대상만으로도 소비된다.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이다. 씹다 질리면 다른 것을 찾기 마련이다. 진실을 찾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일차원적 '인지상정'에 마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는 위선적 측은지심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에 진동하여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주위 공간에 또 다른 진동을 일으켜 퍼진다. 진실에 복무하기 위해선, 내가 어떤 진실을 따르고자 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나 스스로 내 안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한 존재로부터만 진실한 말, 진실한 글, 진실한 행위, 진실한 삶이 나온다. 가장 힘 있는 것은 진실이어야만 한다. 힘을 행사하는 모든 거짓과 사실들은 모두 무너져야 한다.

진실한 존재가 되어 나의 모든 말, 행위 눈빛 하나, 숨소리마저도 진실하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진실하지 못한 존재인가? 말과 행위 그리고 나의 실상은 얼마나 가깝고도 멀단 말인가? 오늘도 그 괴리가 괴롭다. 진실에 진동하여 소리 나고, 그 소리로 주위 공간에 또 다른 진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날마다 변화하며 살고 싶다." - 이효진님의 소감

   

발표하는 이효진 님의 모습.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이 정도의 각오로 나아가지 않으면 분노는 진실을 강력하게 기만하고 말 뿐이다. 도와줄 것처럼 하다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오늘 알고 내일 잊는 일상이 계속되면 분노와 삶은 떨어질 것이다. 어떤 감정은 되는데 감동感動은 되지 못한다. 안나의 삶을 듣고,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이 죽은 삶은 무의미하다. 물론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진실이라 함은 무엇이냐.'
  

참가자 양의진 양이 칠판을 꾸미고 있다. 매주 손수 제작되는 칠판은 세미나의 얼굴이 된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누구도 이 명제에 대하여는 섣불리 말하지 못한다. '섣불리'라는 유예기간을 굳이 주지 않아도, 이 명제에 정면으로 이렇다 할 만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은 실제 상황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의미와 힘을 가지는 말이다. 아무런 맥락 없이 '진실'이라는 단어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언어를 그저 말이라는 껍데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무엇과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세밀한 언어다. 그 언어가 실제로 담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모습은 구체적 상황이 주어지지 않으면 허상에 가깝다.

멀리서, 넓게 보면서 동시에 촘촘히 구석을 살펴야 진실은 어렴풋이나마 잡을 수 있기에 무엇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게 진실을 보는 눈을 길러가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며. 이재명, 백종원, 트럼프, 문재인,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하게 짚으며 시시비비를 가렸고,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 진실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일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실'이라는 거대하고 막연한 단어가 점점 삶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을 하나의 경험을 통해 해석하고 풀어내려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겠지.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언어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관련기사: 진실은 당신의 꿈이다)

섣불리 우리가 본 모든 것을 바로 진실이라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 나아가 다른 상황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 있을 수 있게. 그런 의미에서 최 대표의 마지막 두 강의는 공자의 정명(正名: 말을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 말하고자 했던,
진실로 행하고자 했던,
진실로 진실 되게 했던 언어들이
살아있다.
그 언어는 진실로 산 자에게 주어진다.
진실로 살아온 이들의 언어가, 내 삶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 안송수님의 소감

  

발표하는 안송수 님의 모습.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우리는 현상을 언어화할수록 단편적이고 편협한 사고 속으로 빠져드는 나약한 존재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른 만물은 다 말로 지으시고, 오직 사람만 손으로 조물조물 만드셨다는데(창1:27), 이러한 사람의 습성을 우려한 게 아닐까. 그렇기에 진실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열거할 생각은 없다. 우리에겐 진실로 살려 애쓴 자들의 언어가 있을 뿐이고, 오직 삶으로 살아낼 뿐이다. 겸허하고 담대하게.

안나 폴리코브스카야. 그녀가 찾으려 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녀가 발견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안 것은 체첸 난민의 고통이었을 것이고, 러시아군의 무자비한 학살 행태였을 것이고, 각종 거짓을 늘어놓는 러시아 정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발견한 진실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그녀의 손끝에서 도무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마음, 그것은 조국 러시아를 향한 사랑이었으리라. 그녀가 안 수많은 사실들 위에 그녀의 마음을 얹지 않으면 그녀의 진실이 아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위해 글을 썼다. 사랑을 쏟아 냈다.

안나의 삶에서 분노를 읽고 마는 것은 잠시 해방감을 준다. 해방욕欲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뭔가 자신에게서 정의로움이 불타오르는 그 느낌을 충족시켜 준다. 하지만 안나의 삶에서 깊은 사랑을 읽는 것은 진실을 향한 열망을 추동하며 한 사람의 변화까지 이어진다.

"존재...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가끔 한다.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시간보다는 힘이 들 때 그 물음의 답을 찾길 원한다. 그러나 그 답을 끝까지 찾아본 적은 없는 듯하다. 그러니 계속 그 물음을 하는 거겠지.
진실 세미나 11주... 많은 이야길 듣고 생각하고 나름 많은 이들을 보고 인사했다. 여기 참석한 모든 구성원들은 열심히 알아보고 발표하고 이야기하고...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진실을 위해서...
이런 이들이 많은 세상이라면 세상이 더욱 더 밝고 아름다워질 거란 생각을 하며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진실을 울리는 존재란 생각을 했다." - 조경연님의 소감

  

발표하는 조경연 님의 모습.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진실' 세미나를 마치는 사람들의 분노는 단결적이다. 혼자가 아니라서 더 힘이 된다. 그 힘은 단편적이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다 하겠다. 제 삶을 추동시켜, 안나 그녀처럼 진실을 목도하고 줄곧 지켜보며 그것에 의거해 행동하겠다는 그들의 결기는, 얼기설기 얽혀 있는 삶의 일, 자신과 타인의 삶을 아울러 사람의 일을 정중앙으로 꿰뚫겠다는 소리다. 복잡한 이야기에 단순하게 뛰어든다는 소리다. 다른 잡다(雜多)에 현혹되지 않고 딱 하나인 본질로 뛰어들겠다는 소리다.

'진실을 울린다.' 누가 어떻게 울릴까. 악인이 진실을 은폐하고 마구 짓밟아서 울릴까, 선인이 진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안아줘서 울릴까. 둘 다 울릴 거다. 하지만 전자는 계속 울리기만 할 거고, 후자는 눈물 닦고 같이 일어날 거다.

그리고 이 세미나가 진실을 울렸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안나와 이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을 울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단순히 울음을 넘어 울림이 될 것이다. 널리널리.
 

세미나 참가자들과 마지막으로 한 컷. 널리널리.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새들 #교육 #진실 #최봉실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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