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일 없어도 웃어봅시다

하루종일 거울을 가득채울 '당신'이 필요하다

등록 2019.01.14 21:57수정 2019.01.1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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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희한한 탁상달력을 얻었다. 지름 6cm 정도 되는 동그란 거울하나가 왼쪽 위편에 달린 탁상달력이다. 월력12장 모두 왼쪽 위편에 구멍을 뚫어 거울이 항시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책상에 앉아 월력을 볼 때마다 얼굴이 조그맣게 비친다. 어느 성형외과원장이 보낸 것인데 아마 거울 속 얼굴 보며 성형도 한번 생각해보라는 뜻이겠다. 덕분에 거울을 자주 보게 되었다.


우리는 하루 몇 번씩이나 거울을 볼까? 몇 년 전 무등산에서 만난 중년 사내가 생각난다. 깻재에 올라 한숨 돌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건 중년사내는 주름진 얼굴이 세상고민을 다 안고 있는 듯 어두웠다. 그는 50대 초반에 실업자가 된 후 6년 째 의욕도 식욕도 잃고 매일 두 세 시간씩 무등산을 오르내린다며, 괴롭고 힘들어 누구에게나 매달리듯 말을 건다고 했다. 종교생활도 해보았지만 별 도움이 안 되었단다.

"그저 굶어죽지 않을 만큼은 되지요." 먹고 살 것은 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나온 대답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무슨 말로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엉뚱하게 "거울 하나 가지고 있습니까?"고 물었다. 그 중년사내가 거울을 가지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물은 건 아니다. '거울을 보며 운명을 바꾼 내 친구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부도위기에 빠진 사업가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하도 답답해 어느 날 점술가를 찾았다. 점술가는 '거울에 당신얼굴을 비춰 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친구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딱딱하고 굳은 얼굴', 본인이 보기에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자주 거울을 보고 얼굴을 펴고 억지웃음이라도 웃었다. 그 이후 친구 사업은 상승세를 탔다."

중년사내에게 '운명을 바꾼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신도 거울을 자주 보며 억지웃음이라도 지어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는 내 얘기를 묵묵히 들었다. "웃어요? 웃을 일이 없는데요." 어두운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구부정한 어깨를 웅크리며 깻재를 내려갔다.

지금도 깻재를 오를 때면 그냥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어두운 얼굴을 한 그 중년사내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듯해서이다. 내 권유대로 거울을 자주 들여다 보았을까. 우울증에서 벗어나 얼굴이 밝아졌을까? 사실, 스스로 시도해보니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과 다투어 화가 났을 때. 세상일이 꼬여 심난할 때 거울에 얼굴을 비쳐본다? 대단한 평정심이다. 차가운 거울을 통해 자신의 화난 모습, 심난한 표정을 남 얼굴 보듯 쳐다본다. 그것만으로도 불같은 화 기운이 찬물을 맞은 듯 식혀질 것 같다.


오늘도 습관처럼 탁상 달력거울을 본다. 일정을 기록하고 체크할 때마다 쳐다보니 하루 몇 차례씩 보게 된다. 거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쳐다보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중년 입장이 되어 거울 속을 다시 본다. "웃어요? 웃을 일이 없는데요." '억지웃음이라도 지어보라'는 권유에 중얼거리며 깻재를 내려가던 중년사내 마지막 말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우리가 웃을 일은 있는가? 부도위기에 몰린 사업가친구는 '억지로라도 웃어야할 일'이 있었다. 고객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생계가 끊길지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진 중년실업자는 웃어야할 절박감을 어디서 찾아야하나. 억지웃음이라도 자주 웃다보면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 -----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있습니다 -----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이성복 시 <거울>을 외워본다. 죽음 속에 허리까지 잠겨있는 우리에겐 하루 종일 거울을 가득 채울 '당신'이 필요하다.
#거울 #탁상달력 #실업자 #우울증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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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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