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해도 울렁거리는 밥풀커피... 요즘 그게 그립다

[마침표 대신 물음표⑥] 커피공화국이 씁쓸한 이유

등록 2019.01.15 13:41수정 2019.01.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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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자료사진. ⓒ 박설화




밤하늘 별만큼이나 많은 십자가 불빛. 그만큼 많다던 교회 수를 제친 업종이 있다. 바로 커피전문점이다. 치킨전문점이 지켜왔던 창업 1순위라는 타이틀을 가져온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커피 수입량이 늘면서 국내 시장 규모가 고공행진이다. 우후죽순 들어서는 아파트처럼, 비슷한 생김새로 찍어내듯 늘어나는 커피전문점. 대한민국이 커피공화국이라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한 때 단골집이었던 커피전문점을 찾아 나섰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던 곳, 애인과의 데이트를 즐긴 곳이기도 한 추억의 장소다.

푹신한 의자에 머리 높이 이상으로 높게 뻗은 등받이는 편한 분위기를 더 했다. 햇볕 자체가 조명이 되는 창가 옆 테이블은 소위 명당자리였다. 그래서 자리를 꿰차던 손님이 나가기라도 하면 자연스레 각자의 커피를 들고 이동하곤 했다. 테이블 간격도 널찍널찍해서 가림막 없이도 온전히 우리만의 공간을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에게도 말 못 할 고민거리를 앞에 앉은 친구와 애인에게 술술 털어놓게 되는 신비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판에 박힌 커피전문점을 보다 보니 당시 평범하게 여겼던 그곳이 더욱 특별해졌다. 추억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5~6년 만에 찾은 그곳은 50년 만에 찾은 것처럼 너무도 새로웠다. 바뀐 것을 찾기보다 바뀌지 않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그 어려운 숙제를 풀어보니 바뀌지 않은 것은 커피전문점의 위치뿐이었다.

이젠 기억 속에만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의 추억은 오롯이 머릿속 깊숙이에 박힌 기억을 곱씹으며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됐다.


햇볕이 창을 뚫고 들어오는 명당자리는 거대한 소파와는 이별하고, 창을 따라 긴 테이블과 1인용 의자를 품었다. 사라진 것은 테이블, 소파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좀처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가에 빼곡히 들어찬 손님에게 마주 앉은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이따금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과거 '지혜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정보를 나누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공간이었던 커피집이 이제 더는 만남의 장소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 많은 커피전문점이 대세를 따라가고 있었다. 푹신한 소파와 무릎 높이의 테이블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도서관에나 어울릴 만한 테이블과 의자가 대신하고 있다. 1인 소비시대가 바꿔 놓은 광경이다. 커피전문점을 만남을 위한 목적보다는 공부하거나 업무를 보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최근 몇 년 사이 혼자 커피를 마시는 일이 잦았다. 다수의 행동이 트랜드를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혼자 마시는 커피는 어색함을 느껴 볼 새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인간관계의 시작에 함께 했던 커피 

애초 내 삶에서 커피는 인간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였다. 지난 10여 년간 취재해온 나는 하루에도 서너 사람과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왔다. 그럴 때마다 '같은 거로 마시겠다'라는 게 대부분이 커피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커피를 맛본 것도 만남에서 비롯됐다. 80대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다. 그녀는 취재차 찾은 경상북도 예천의 한 마을회관에서 이장님을 대신해 날 맞아 주신 분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앉으라며 커피를 타주신다고 한다. 서서히 굽혀지는 허리를 한 번씩 힘주어 올리는 모습이 참으로 힘겨워 보였기에 난 두 손을 저으며 커피를 사양했다. 하지만 내 말과 몸짓은 할머니에게 닿자마자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손은 어느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토색 플라스틱 컵에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밥숟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커피잔으로 쓰인 쇠 밥그릇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상당히 대접해주시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손님이 오거나 어른들에게 차를 건넬 때 접시를 꼭 받치는 게 예의라는 걸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타주신 커피는 예상대로 쓴맛이 강했다. 받아 들 때부터 물의 양이 컵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을 눈치챘었다. 서너 모금이면 비울 수 있는 양이다. 한 모금째는 눈으로 확인한 쓴맛을 미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모금째는 커피 덩어리를 발견했고, 이어 할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컵을 살살 돌리며 덩어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세 모금째, 다 녹인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컵 속으로 또 다른 덩어리가 보인다. 밥풀이다. 조금 전 커피를 휘저은 밥숟가락이 남긴 흔적이었다. 3초도 안 됐을 것이다. '삼켜야 하나 남겨야 하나'. 난 그대로 삼켰다. 메슥메슥 울렁거리는 속도 같이 삼켰다. 먼 곳까지 온 손님을 커피밖에 대접하지 못했다고 계속해 아쉬워하는 할머니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그 밥풀 커피가 그리운 요즘이다. 내가 정말 그리운 건 밥풀 커피가 아닌 커피를 건넨 할머니의 마음일 게다.

아파트 하나의 출입문에 50가구가 넘게 살아도 인사조차 오가지 않는 요즘. 커피 한잔하자며 누구를 초대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빽빽한 아파트가 사람들의 마음을 팍팍하게 만든 걸까. 아파트가 아닌 주택 단지에서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소음으로, 상대방의 관심을 염탐으로 여기며 현관문보다 마음 문을 더 단단히 닫고 산다.

커피공화국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커피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도구가 아닌 그냥 잠을 깨우는 쓰디쓴 검은 물일지도 모른다. 커피공화국이란 타이틀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https://blog.naver.com/hobag555)
#커피공화국 #마침표 대신 물음표 #커피전문점 #카페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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