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유래와 역사, 과거와 현재

페미니즘은 어떻게 현대까지 흘러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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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kbs0131)등록 2019.01.18 08:37
 최근 몇년 사이에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주제가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박근혜 씨가 2012년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외신들은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 사상이 부각되고 있다고 보도를 하기도 했다. 이후, 여성시대, 메갈리아, 워마드 등 급진적이고 과격한 페미니즘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매우 유명해졌다.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정치인도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어떠한 사상인지, 어떻게 시작된 사상인지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무엇보다 우선해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먼저 알아보자.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아우르는 용어다. 여성의 참정권 인정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사회적인 이미지와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여성의 권리 확장과 성차별적인 대우의 타파를 통해 여성해방과 성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The belief and aim that women should have the same rights and opportunities as men; the struggle to achieve this aim.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

- 옥스포드 영어사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에도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체적인 힘에서 비롯된 차이만을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라고 언급했다.현재 '프로토 페미니즘(Proto Feminism)'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이 사상은 일반적인 페미니즘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의 성평등 이념을 일컫는다. 페미니즘의 개념이 정립되어 프로토 페미니즘과 구별된 시기가 중요하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1837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가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최초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인물은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위베르틴 오클레르(Hubertine Auclert, 1848~1914)이다.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건 19세기 후반 이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위베르틴 오클레르 최초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 인물이다. ⓒ 위키피디아

 
 18세기 근대 유럽, 당시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고, 동등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하지만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은 여성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일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에게도 참정권 등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벌어진 논쟁은 근대적인 성평등 이념을 이끌어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계몽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계몽사상의 한계인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비판적 성찰을 가졌다.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가 활동하던 시절도 바로 이 때이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당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때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일컬어지는 여성이다. ⓒ 위키피디아

 
 잉글랜드 태생인 메리는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 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1838)가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계몽시대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였다. 그녀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과 그의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 1807~1858)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페미니즘 사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강화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부부는 뒤이은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과거의 여성운동을 주도한 페미니즘이다. 여성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며, 경제적 자유주의에 따라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역할과 권리를 부여한다. 그 이후의 사회적 전개는 자유시장의 흐름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여성에게 특수한 우대가 부여되는 것에는 대개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회적인 남녀의 구분을 최대한 없애서 자유주의를 여성을 포함한 모든 개개인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의 페미니즘을 흔히 '1세대 페미니즘'이라고 지칭한다.
 

존 스튜어트 밀과 그의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 밀 부부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위키피디아

 

 1세대 페미니즘의 성취로 여성들의 참정권 보장 등 법적 기본권이 이전보다 더욱 확대되었고, 세탁기, 분유, 피임약 등의 발명은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가사노동이나 출산의 부담을 크게 줄여줬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지속되고 있었다. 68운동 이후의 세대들은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 <제2의 성>이 있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한정되고 달라지지만, 남성은 여성에게 그렇지 않다. 여성은 우발적 존재이다. 여성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 비본질적이다. 남성은 주체이다. 남성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여성은 타자이다. 비본질로서의 여성이 본질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힘으로 그러한 반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한정되고 달라지지만, 남성은 여성에게 그렇지 않다. 여성은 우발적 존재이다. 여성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 비본질적이다. 남성은 주체이다. 남성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여성은 타자이다. 비본질로서의 여성이 본질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힘으로 그러한 반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제2의 성 中

 1963년,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 1921~2006)이 쓴 <여성의 신비>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여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주부로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 과도하게 찬양받는 사회를 비판했다. <여성의 신비>는 큰 반향을 이끌어 1963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한 임금평등법이 제정되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는 '현대 여성 운동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의 사회 운동을 벌였다. 1966년에는 전미여성기구(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를 창립하여 여성권리장전을 채택하였는데, 이 단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여성주의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코넬 대학교에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는데 공헌했다.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 베티 프리던 그녀의 저서 <여성의 신비>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 위키피디아

 

 1967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1945~2012)이 뉴욕급진여성모임(New York Radical Women)을 창설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급진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을 표방했다. 이들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항의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하는 마네킹을 땅에 묻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녀는 1970년 <성의 변증법>에서 프로이트, 라이히, 마르크스, 보부아르 등의 사상을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종합하여, 여성학의 토대를 형성했다. 그녀는 남성 지배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구성되었으며,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통해 여성이 성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여성운동가 슐라이어스 파이어스톤 뉴욕급진여성모임을 창설한 여성운동가이다. ⓒ 위키피디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당시 젊은층이었던 68운동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캐서린 맥키넌(Catharine MacKinnon, 1946~ )이나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1946~2005)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가부장제나 강간과 연관짓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노, 성매매, BDSM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80년대 안티포르노그래피 운동을 주도했다. 드워킨은 그녀의 저서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에서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던지 "결혼이란 강간을 정당화하는 제도"등 매우 극단적인 발언을 했으며 문예 비평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강간과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심지어 보수 기독교계와 결탁하여 음란물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도덕적 권위주의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판받았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 너무 극단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크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었다. ⓒ 위키피디아

 
 이렇게 섹스 논쟁, 포르노 논쟁 등을 거치면서 2세대 페미니즘은 내부 갈등을 빚으며 쇠퇴하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활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그 원인을 남성 지배의 문제로 보았던 급진주의를 절충한 사조였다. 또한 페미니즘 외부에서도 페미나치, 포스트 페미니즘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대중들이 페미니즘에 질려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역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학과 퀴어이론의 영향으로 2세대 페미니즘과는 선을 긋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2세대 페미니스트에 비하면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약했지만, 대신에 일상의 페미니즘을 주장했다. 정신분석학, 포스트 모더니즘, 생태주의 등 다양한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페미니즘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냈다. 그리고 어떤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페미니즘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조를 '3세대 페미니즘'이라고 칭한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레베카 워커(Rebecca Walker, 1969~ ) 대표적인 3세대 페미니스트이다. ⓒ 위키피디아

 
 3세대 페미니즘은 2세대보다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여성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나 서구권, 백인, 중산층 여성 등의 권리뿐만 아니라 제3세계, 제3의 성, n개의 성 등의 "교차성" 담론에 도달하였다. 즉 2세대 페미니즘에서도 전제되어왔던 소위 '여성문제'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규정되는지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학계의 논의가 진전됨에 따라 여성과 여성문제를 일반화된 범주로 인식하는 것은 오류라는 합의에 이른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여성이라도 무급가사노동에 종사하는 30대 히스패닉 여성과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50대 백인 여성의 삶의 양식은 크게 다르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모두 '여성문제'라는 프레임에 끼우는 것이 아니라 n개의 성, 내지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 등의 개념을 통해 좀더 넓은 범위에서 성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현대 페미니즘 학계의 주된 경향이다. n개의 성에는 생물학적 남성과 그 속의 수많은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포함된다. 여성 외의 다른 소수성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 트랜스 페미니즘, 아나코 페미니즘, 우머니즘과 같은 다른 소수자와의 연대, 여성내에서의 차별을 주장하거나 아나키즘등 사상을 결합한 페미니즘이 3세대 페미니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주류 페미니즘은 소위 메갈리아, 워마드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워마드 성체 훼손 사건, 이수역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일으켜 논란의 중심에 있으며, 페미니즘을 남성혐오로 낙인찍히게 만든 이념이다. 높은 배타성은 물론이고,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해온 극단적인 발언이나 그동안 저질러온 여러가지 만행 때문에 "페미니즘은 변질되었거나 여성우월주의가 근원이다" 라는 편견을 심어놓기까지에 이르렀다. 국내의 여성운동 정치지형에서 자유주의, 급진주의,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경계선이 모호하기 때문에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만행이 다른 계열 페미니즘의 인식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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