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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기성용 필요없다"고? 벤투호에 베테랑이 있어야 한다

필리핀전 후 쏟아진 비판, 우승 위해서는 여전히 경험 많은 선수들 필요해

19.01.08 17:57최종업데이트19.01.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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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경기였다. 파울로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난 7일 오후 10시 30분(한국 시각)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에 위치한 알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필리핀과 2019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C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에서 1-0 신승을 거뒀다.

경기 내용은 답답했다.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 창은 무뎠고 상대의 간헐적인 역습에 방패도 다소 흔들렸다. 황의조의 한 방이 없었다면 무승부도 가능했던 흐름이었다.

팬들의 기대와 달랐던 경기 내용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황의조와 이청용 등 공격 장면에서 번뜩이는 모습을 보인 소수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리핀전 이후 구자철과 기성용 향해 쏟아진 비판

비판은 당연하다. 국제대회 첫 경기의 어려움과 필리핀의 노골적인 수비 전술을 감안해도 한국 대표팀의 공격 작업이 수월하지 않았던 점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선수들을 향한 과도한 비난과 조롱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특히 스쿼드에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팀에 합류한 베테랑 미드필더 기성용과 구자철에게 의외로 많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먼저 구자철은 일부 축구 팬들로부터 "어서 은퇴하라"라는 조롱에 시달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속도와 에너지가 떨어진 구자철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논지다. 느린 걸음으로 공격 템포만 잡아먹는 자원이라는 비판인 셈이다.
 

▲ 돌파하는 구자철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7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구자철이 돌파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구자철이 과거에 보여줬던 기동성과 번뜩임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허나 구자철이 공을 지키고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은 여전히 특별하다. 필리핀전에서 전체적으로 부진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프리킥 찬스를 두 번이나 만들었던 선수가 구자철이다. 밀집수비를 뚫어내는 최고의 해법인 세트피스 상황을 구자철이 이끌어냈다.

지난 10년 간 중원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기성용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필리핀전에서 기성용은 후반 초반에 부상으로 황인범과 교체되었는데, 이후 경기력이 살아나자 "이제 기성용이 필요 없다"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다.
 

7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기성용이 황희찬의 패스를 받아 드리블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벤투호에서 기성용의 역할은 수비진에게 공을 받아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은 기성용의 역할이 무의미하게 아예 엉덩이를 빼고 후방으로 주저 앉았다. 밀집 수비를 타개하는 세부적인 공격 전술의 아쉬움을 기성용 한 선수에게 전가하는 일은 부당하다.

기성용의 수비력 부족에 대한 지적도 자세히 살펴보면 기성용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기성용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성용의 약점을 보완해줄 인물을 수년간 찾아왔고, 벤투 감독은 필리핀전에서 정우영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기성용의 수비력 문제는 단순히 기성용을 벤치에 앉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기성용만한 패싱력에 수비력까지 겸비한 미드필더를 보유 혹은 발견하지 못한 한국 축구대표팀 전체의 문제다.

필리핀전 활로 뚫은 '베테랑' 이청용... 여전히 베테랑이 필요하다

기성용과 구자철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또 다른 베테랑 이청용은 오랜만에 찬사를 받고 있다. 후반 중반 구차절을 대신해 그라운드를 밟은 이청용은 투입 직후 결정적인 침투 패스로 선제 득점에 단초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드리블과 위치 선정으로 미드필더진에 힘을 불어 넣은 이청용이다. 그간의 의심을 말끔히 씻어내는 품격 있는 활약이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 황의조, 이청용, 황희찬, 지동원이 지난 2018년 12월 29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크리켓 필드에서 열린 훈련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다. ⓒ 연합뉴스

 
필리핀전에서는 특히 이청용의 경험을 엿볼 수 있었다. 크로스에 매몰됐던 단조로운 공격 패턴은 이청용의 전진 패스 한 번으로 해결됐다. 1-0의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굳이 무리한 공격보다는 템포를 조절하며 승점 3점에 힘을 집중한 선수 중 한 명이 이청용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청용의 내공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국제대회는 일반적인 리그 경기보다 압박감이 심하고 변수가 많다.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필리핀전의 이청용처럼 국제대회에서 어려운 순간에 활로를 뚫는 선수는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벤투 감독이 기성용과 구자철의 은퇴를 만류하고 그들을 대회에 합류시킨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조별리그 멋지게 통과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우승하지 못하면 사실상 실패다. 벤투 감독 입장에서는 대회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임해야 한다.

한 경기 결과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대회에 임해야 한다
 

▲ 부상으로 교체되는 기성용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성용이 7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교체되고 있다. ⓒ 연합뉴스

 
필리핀전은 '작은 위기'에 불과하다. 토너먼트에서 강력한 상대를 만나면 더 험난한 고난에 직면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베테랑들의 경험이다. 굳이 경기에 나서지 않더라도 베테랑들은 벤치에 앉아서 선수단 전체를 격려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할 수 있다. 축구가 피치 위의 22명의 선수 간의 대결이 아닌 팀과 팀의 맞대결이라 보면 베테랑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국제대회에서 베테랑들의 힘을 믿고 성과를 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호주에서 열렸던 지난 2015년 아시안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베테랑 수비수 곽태휘와 차두리의 농익은 경기력 덕을 봤다. 

물론 무작정 베테랑을 기용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 중인 기성용과 구차절을 내칠 정도로 한국의 선수풀(pool)이 넓지 않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벤투 감독은 점유율 축구를 지향한다. 점유율 축구에서 공을 잘 다루고 공의 소유권을 잃지 않는 미드필더의 존재는 필수조건인데, 기성용과 구자철만큼 이 조건에 부합한 선수는 거의 없다. 만일 벤투의 점유율 축구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결과는 벤투의 전술적 패착이지 그 안에서 뛴 선수들의 패배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 '왕의 귀환'의 시작점이다. 59년 만의 아시아 정상 탈환을 향한 여정의 첫 걸음을 뗐을 뿐이다. 필리핀전에서 부진했던 일부 베테랑 선수들에게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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