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서울의 봄' 짓밟다

[무위당 장일순평전 42회] 유신보다 더 포악한 5공시대가 시작되다

등록 2019.01.05 17:28수정 2019.01.0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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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1979년 12월 12일 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튿날 동아일보 호외. 반란군의 하극상을 보도해야할 신문이 합수부의 발표에 따라 정승화 총장 연행사실만을 보도하고 있다. ⓒ 이정근

장일순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출신 정치군인들은 4월 14일, 전두환이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하여 내각에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는 한편, 그 전 단계로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했다. 

12ㆍ12 하극상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은 13일 새벽부터 국방부ㆍ육군본부ㆍ수경사 등 국방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ㆍ신문사ㆍ통신사를 점거하여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었다.

이들은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거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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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80년 5월 17일 저녁 9시경 중앙청 국무회의실에는 비상국무회의 소집 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저녁에 갑자기 국무회의가 소집되는지, 무슨 안건을 심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했다.

신현확 총리는 9시 42분에 제42회 임시국무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국방부에서 '의안 360호'로 제출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옥길 문교장관이 의안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찬반토론은 전혀 없었다. 신 총리가 이 의안의 가결과 국무회의의 산회를 선언했을 때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찬반토론도 없이 단 8분 만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이 의결된 것이다. 실로 최규하 정부는 신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토론 한마디 없이 헌법기구인 국회를 쓸어버리고 민주화를 짓밟는 그리하여 5ㆍ17쿠데타를 뒷받침하는 계엄포고령이 국무회의에서 어이없게도 처리된 것이다. 신군부의 이른바 '싹쓸이'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임시국무회의가 계엄포고령을 의결한 것은 요식절차에 불과하고 이보다 앞서 이날 오전 11시부터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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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와 전두환은 권력에 눈멀어 민주주의를 유린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979년 12.12군사반란 후 찍은 기념사진 ⓒ 연합뉴스

전군 지휘관회의는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의 정세보고와 현황설명 후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이 강경발언을 계속했으며, 일부 신중론이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신군부는 회의가 끝날 무렵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의 연서명을 받았다. 

회의를 마친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국 주요 지휘관들의 연서명이 첨부된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오후 5시경 신 국무총리를 찾아갔다.

신 총리는 국보위설치안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였다. 셋은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군부의 시국대책안을 설명했다. 최규하는 오후 7시경 이를 승인하고 신 총리에게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보다 앞선 16일 밤 10시 30분경, 최 대통령이 사우디 방문에서 앞당겨 귀국하자 전두환은 신 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 국방, 김종환 내무장관과 청와대에 들어가 비상계엄 확대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청와대를 나온 전두환은 보안사의 권력장악 시나리오 준비팀인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 심복들을 가동시켜 군지휘관회의에서 결정할 사항과 민주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시켰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인근 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했다. 특히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부대를 파견했다. 

신군부는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 △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ㆍ시위의 금지 △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어서 18일에는 김대중ㆍ김상현ㆍ김종필ㆍ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ㆍ노사분규ㆍ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장일순은 이번에는 잡혀가지 않았으나 경계와 감시는 어느 때 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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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통해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면서 5.18은 막을 내렸다. 사진은 '충정작전'으로 체포된 시민군.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전국계엄 확대와 김대중 구속 등에 대한 저항에 나선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5월 20일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조차도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국헌문란을 자행했다.

실질적인 물리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치사회 일반에 대한 모든 권력을 찬탈하고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국보위는 초법적인 권력기관으로 등장, 정권을 탈취해 5공정권 수립에 받침대 노릇을 했다. 이로써 유신보다 더 포악한 5공시대가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5공화국 #전두환 #12.12쿠데타 #5.18 #신군부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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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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