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연시에 개최되는 블랙리스트 영화제 ⓒ 아트하우스 모모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지원이나 상영에 제한을 받았던 '블랙리스트 영화'들이 연말과 새해 초까지 특별히 상영된다. 12월 31일~1월 2일까지 이화여대 안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블랙리스트 영화제'는 권력에 의해 낙인 찍혀 부정한 방법으로 배제당한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불러오는 자리다.
해가 바뀌는 연말과 연시에 특별한 행사를 준비한 아트하우스 모모 측은 "'관객이 주인이 되는 영화관'이라는 비전 아래,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운영하는 관객 참여형 프로그램인 '모모 큐레이터'의 구성원들이 직접 기획에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를 기점으로, 지금껏 한국 영화계가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을 서로에게 묻고자 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최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를 놓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번 행사를 기획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트하우스 모모 관계자는 "민주화 이후 최악의 검열 정책이 폭로된 후에 영화계는 여러 번의 겨울을 견뎌내며 상처가 아물기를 소원했으나, 관련자 처벌이나 피해 작품에 대한 복권 절차는 여전히 요원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엄중한 꾸짖음과 따스한 치유의 의무는 지금 관객인 우리 앞에 놓여있다"며 "이번 '블랙리스트 영화제'를 통해 검열은 거부하고,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봤던 영화와 당사자들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용기의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미적거리는 '블랙리스트 관련자 처벌'에 항의
▲ 블랙리스트 영화제 주요 상영작 ⓒ 아트하우스 모모 제공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수많은 작품 가운데 엄선했다. 2014 년부터 2016 년까지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의 다양성 영화 개봉 지원 및 독립영화 제작 지원에서 배제된 네 편의 작품 <그림자들의 섬>, <밀양 아리랑>, <불안한 외출>, <명령불복종 교사> 등 모두 12편이다.
과거 청와대의 영진위 지원 '배제 지시 키워드'였던 '세월호'와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와 <두 개의 문>, 재일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가 쌓아 올린 10년 간의 투쟁의 목소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11 영상물등급위원회 제한상영가 판정 이후 5년의 소송 끝에 일반 개봉할 수 있었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가 상영된다.
이명박 정권 당시 개봉한 지 이틀 만에 상영 중단 및 개봉관 축소를 겪은 <천안함 프로젝트>, 국정원으로부터 문체부와 영진위 지원 배제 지시를 당한 <불온한 당신>, 진실을 전하려다 쫓겨나고 배제된 언론인들의 이야기 < 7년-그들이 없는 언론 >,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를 촉발하고 독립예술영화관 지원 중단의 시발점이 된 <다이빙벨 그후> 등이다.
시기별로 상징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오랜 시간 투쟁을 그린 영화다.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한진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이 벌여온 힘겨운 싸움을 설명해 주는 작품이다.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2017년 들꽃영화상 다큐멘터리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 영화제에서 작품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당시 자본의 이익을 대변했던 박근혜 정권에서는 불순한 영화였을 뿐이다. 최근 한진그룹 세 모녀의 온갖 갑질과 불법 행위 등이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고 있는 가운데,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한진중공업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이 영화는 생생하게 전달한다.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와 김철진 감독의 <불안한 외출>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의해 배제되고 검열 배제당한 영화들이다.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는 이명박 정권 당시 박선이 영등위원장 시절 제한상영가 등급 결정으로 사실상 상영을 봉쇄했다. 법원 역시 무리한 등급 분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1심 판결 패소 이후에도 영등위가 불복해 3심까지 시간끌기식 행태를 이어왔다.
김철진 감독의 <불안한 외출>은 통일운동가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이경숙 위원장 시절 영등위는 등급 분류 전 상영을 문제 삼아서 제작사를 고발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문제 없는 영화를 영등위가 괴롭혔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체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블랙리스트 조사위)' 조사 결과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 등으로부터 '문제영화'로 낙인이 찍히면서 영등위로부터 제재와 외압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영등위는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실무적인 책임이 있는 부분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실상 사과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영화계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 않는 영등위 내의 적폐 직원들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번 블랙리스트영화제에서 영등위로부터 탄압을 받은 영화 두 편이 모두 포함된 것은 '사과에 미적거리는' 영등위에 대한 항의의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앞서 영화진흥위원회는 27일 블랙리스트 관련자 전원을 징계하면서 영화계의 요구에 부응했다.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문화민주주의의 의미
▲ 블랙리스트 영화제 주요 상영작 ⓒ 아트하우스 모모 제공
박근혜 정권에서 일본과 야합 논란이 불거진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갖은 방법으로 탄압했던 세월호에 관련된 영화 <나쁜 나라>, <다이빙벨 그후>, 지금은 모두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거리에서 떠돌던 당시 해직언론인들을 다룬 수작 < 7년-그들이 없는 언론 >은 민주언론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블랙리스트 영화제에서는 상영 외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관계자들과의 만남의 자리가 마련된다. 올해 마지막 날인 31일(월) 오후 2시에는 <나의 마음은지지 않았다> 상영 후,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와 그 이후에 관해 이야기하는 '안해룡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새해 첫날인 2019년 1월 1일(화) 오후 1시 <불안한 외출> 상영 후에는 김철민 감독과 함께 부당한 공권력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떻게 개인을 괴물로 만들고 한 가정의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같은 날 오후 <나쁜 나라> 상영 후에는 참사 이후 특별법 제정을 위한 1년간의 투쟁의 시간이 예정됐는데, 함께 울고 함께 소리치는 세월호 유가족의 표정을 가장 먼저 포착해낸 김진열 감독이 관객들과 만난다.
영화제의 마지막 날인 2일(수) 오후 7시 <다이빙벨 그후> 상영 후 이원재 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대변인이 나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가의 조직적 폭력'을 주제로, 블랙리스트의 진상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과제에 대해 고찰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에 열릴 '블랙리스트 영화제'는 헌법을 유린한 국가의 조직적 폭력으로 부당하게 배제되었던 작품들을 스크린으로 만남과 동시에, 관련 인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문화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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