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가 본 세상, 그리고 노랑

고흐의 그림, 삶, 그리고 노란색

등록 2018.12.05 09:28수정 2018.12.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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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작품 ⓒ public domain

 
<씨 뿌리는 사람>

그림에 대해서 관심을 좀 가지려고 하면 고흐에 대해서 듣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러다 보면 고흐의 노랑에 조금씩 물드는 느낌이다. 밀레에 대한 고흐의 절절한 존경심이 가득한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을 보면 화폭의 상단 1/4은 온통 강렬한 노란색이다. 하지만 나머지 3/4은 온통 보라색이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1888년 9월 3일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색채를 통해 뭔가 보여주고 싶어. 서로 보완하는 두 색을 결합해서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만들어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만들어내는 것,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게 얼굴을 밝은 톤으로 빛나게 해서 사상을 표현하는 것, 별을 그려 희망을, 석양을 통해 모델의 열정을 표현하는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을 거야.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니? (최상운, <고흐 그림 여행> 204쪽에서 재인용)

'색의 대조를 통해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서 해냈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랑과 보라의 대조로만, 단지 색으로만' 표현하려 했다고,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흐의 이 그림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두 그림은 너무 다르다. 등장인물의 자세가 유사하다는 점을 빼면, 과연 이 두 개의 그림이 공유하는 다른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작품 ⓒ public domain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리얼리즘을 제대로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양을 읽어내는 이유가 눈에 보인다. 대지에 씨를 뿌리는 신성한 노동에 나선 주인공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모자에 가린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기에 우리의 시선은 그의 동작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팔을 휘두르는 동작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천리마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 구호 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있던 표어 "노동이 너를 해방시킨다"를 덧붙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반면, 빈센트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림을 마주하면, 우선 강렬한 태양에 압도되고, 다음에는 두 색의 현란한 대조에 시선이 간다. 도대체 왜 보라색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보라색 땅은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어쨌든, 인물은 나중에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밀레의 그림에서와는 달리,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팔에서는 역동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자세라면 그냥 들판을 걸어가는 중이라고 설명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자는 쓰고 있지만, 눈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조금 희극적인 느낌까지 든다. 동틀 녘 또는 석양이 깔리는 시간에까지 노동에 매진하는 밀레의 주인공이 노동자의 비애와 장엄함을 보여준다면,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찬란한 태양을 등지고 희망의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편지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고흐의 관찰력과 상상력에 감탄했지만, 곧 고흐가 믿고자 하는 '실제'에 대해 생각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말이다.

빈센트가 본 세상, 그리고 노랑


고흐의 노란색에 대한 집착은 싸구려 술 압생트의 독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는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고흐가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술에 취해 하늘이 빙빙 돈다. 그렇게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명작이 탄생한다. 그야말로 고흐는 자신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고흐의 편지는 '실제'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불안한 어조로 확인을 구하는 목소리로 끝난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니?

고흐는 묻는다. 자신에게 보이는 사물의 실제, 그것이 너도 보이지 않느냐고. 애절한 어조가 느껴진다. '이것이 나만의 실제는 아니겠지, 내 눈에 보이는 실제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라고 불안해하는 빈센트, 그가 동생에게 동의를 구하는 짧은 부가의문문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반 고흐, <해바라기>, 1889년 작품 ⓒ public domain

 고흐의 <해바라기>는 아마도 <모나리자>만큼 유명할 것이다. 이 그림은 1987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3950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가격에 팔렸는데, 이규현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따르면 책이 나온 2014년 당시에도 이 그림은 아직 가장 비싼 그림 목록에서 96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지에의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경매 직후부터 위작 논란에 휘말렸다. 이 그림은 고흐가 세상을 뜬 지 11년 후인 1901년 파리의 한 전시회에 나와 주목을 받았는데, 그림의 소유주는 고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삼류 화가였다.

경매 이후에 한 영국인은 이 그림의 원 소유주인 프랑스인 삼류 화가가 이 작품의 원작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증거 중 하나는 해바라기 그림을 여섯 점 그렸다고 밝히는 고흐의 편지다. 하지만 그 편지를 쓴 이후에 고흐가 해바라기 그림을 더 그리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1889년 <해바라기>는 노란색에 대한 강렬한 탐구 끝에 탄생한 논문과 같은 그림이다. 세 송이부터 열다섯 송이까지 끊임없이 진화한 해바라기 그림에 앞서, 빈센트는 논문을 위한 선행연구라도 하듯이 <유럽 모과, 레몬, 배 그리고 포도>라는 습작을 그렸다.

하얗고 푸르게 휘발하는 듯한 포도를 제외하면, 등장하는 모든 과일이 노란색이다. 더 나아가 배경까지도 노랗다. 노란색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그림을 1887년에 완성한 빈센트는, 노란색의 화신인 해바라기에 도전할 용기를 얻은 걸까.

 

반 고흐, <유럽 모과, 레몬, 배 그리고 포도> ⓒ public domain

 
해바라기 시리즈의 대표작, 1889년 <해바라기>를 보자. <씨 뿌리는 사람>이나 <유럽 모과, 레몬, 배 그리고 포도>에서 보이는 현란하게 춤추는 노란색은 자취를 감췄다. 차분한 벽면, 바닥, 꽃병, 그리고 활짝 피고 봉오리 진 열다섯 송이의 해바라기 모두, 조금씩 다른 노란색이다.

많은 사람이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빈센트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는다. 심지어 이것이 그의 마지막 그림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영화 <러빙 빈센트>는 고흐가 이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밀밭에서 총에 맞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활약하는 노란색은 격정적이고 어둡다. 화면 가득 날아가는 까마귀 떼가 아니었더라도, 붉은 흙과 어두운 하늘과 어울려 있는 밀밭의 노란색은 희망의 느낌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어두운 노랑이다. 비극으로 마무리 지어진 빈센트의 삶을 예지하는 듯하다.

1889년 <해바라기>가 빈센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면 어땠을까? 차분함을 넘어 섬세한 자기절제를 보여주는 듯한 이 그림의 색조는 우리가 아는 반 고흐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빈센트를 생각할 때 연민부터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외면받고 괄시받은 천재가 아닌, 경지에 오른 색의 대가로서 우리는 빈센트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씨 뿌리는 사람 #까마귀가 있는 밀밭 #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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