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 문화라는 신화를 한순간 전복시키기 위해, 소설 <가출>

[편집자가 독자에게] 조남주 작가의 K-픽션 023 <가출>

검토 완료

김형욱(singenv)등록 2018.11.29 21:11
 

조남주 작가의 <가출> 표지 ⓒ 아시아

 
저희 아시아 출판사는 태생부터 '세계인'과 함께 하는 콘텐츠 개발에 주력해왔습니다. 2006년 국내외 유일무이한 한영대역 문예 계간지 <계간 아시아>를 시작으로 2012년 한국문학의 가장 중요하고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들의 대표작을 주제별로 선정하여 선보인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이하, '바이링궐'), 2014년 최근 발표된 가장 우수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엄선하여 매 계절 한 편씩 선보이는 <K-픽션>, 2017년 한국 대표 시인의 자선(自選) 시집 시리즈 <K-포엣>까지. 

이중 <바이링궐>은 지난 2015년 장장 110권으로 마무리된 가운데, 다른 한영 대역 문학 시리즈들을 계속 출간하고 있습니다. <K-픽션>과 <K-포엣> 시리즈는 <계간 아시아>를 통해 먼저 부분적으로 선보인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나오는데, <K-픽션>은 2012년 처음 선보였습니다. 

<바이링궐>의 연장선상이라 할 만한 <K-픽션>은 단편소설 단 한 편에 해설 한 편, 그리고 작가의 말과 비평 몇 편이 실려 있는 초경량 문고판입니다. 지금은 많은 출판사들이 단편 또는 중편 소설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는데, 저희는 오래전부터 해왔던 작업이죠. 더구나 모든 내용을 영어로 한 책에 선보이기도 하니, 유일무이한 파격의 일환이라고 자부합니다. 

아쉽게도 잘 팔리진 않습니다. 이 시리즈의 최대 차별점인 한영 대역이 대중들에겐 가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한, 단편소설 한 편 읽는 것인데 굳이 이 책을 사지 않고 단편집을 사면 되겠지요. 반면 출판계, 특히 작가계에서는 꽤 알려진 것 같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기획이기도 하거니와, 표지에 작가 얼굴이 큼지막하게 있고 한영 대역이기에 작가들이 국내외 어디서든 일종의 명함처럼 자기소개의 대용으로 쓰기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K-픽션>이 어느덧 4년이 훌쩍 지났고 23권이 나왔습니다. 이젠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계간 아시아>에서는 매호 'K-픽션'이라는 꼭지 하에 영어 본문과 한영 창작노트, 한영 해설을 선보이고 단행본으로는 비평을 추가해 모두 한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판엔 계간지에서는 이 꼭지 저 꼭지로 옮겨다녔었고 단행본으로는 3~5권씩 한꺼번에 출간되어 몇몇 책들은 빛을 많이 보지 못했었죠. 

이 시리즈는 '계간 아시아'와 '아시아 출판사'가 연계된 자체 심사위원단에 의해 매 계절 최고의 작품을 선별하는지라 겹경사를 받은 적도 종종 있습니다. 6번째 작품 황정은의 <양의 미래>는 제59회 현대문학상을, 16번째 작품 김금희의 <체스의 모든 것>은 제62회 현대문학상을, 20번째 작품 권여선의 <모르는 영역>은 제19회 이효석문학상을 탔죠. 13번째 작품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와 18번째 작품 최은영의 <그 여름>은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K-픽션> 시리즈 작품들이 해당 작가의 대표 소설집의 대표작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같은 제목의 저희 책이 없었다면 표제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장황하게 <K-픽션>의 내막을 들여다보며 본의 아니게 자사 홍보를 하게 되었지만, 한국문학번역원 이하 한국의 문학계 전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소규모로나마 대신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발로입니다. 

이번 2018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K-픽션> 23번째 작품은 조남주 작가의 <가출>입니다. <82년생 김지영> 등으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이자 가장 첨예하고 현시류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 작가 조남주의 단편소설이죠. 그의 소설은 현재를 비추는 논하는 가장 적절한 콘텐츠일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도 잘 나가고 너무나도 바쁠 게 분명할 조남주 작가께 청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내심 떨렸죠. 하지만 작가님은 너무나 기뻐하셨고 너무나 흔쾌히 허락하셨으며 너무나 칼같이 마감을 지켜주셨습니다. 편집부는 너무나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죠.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그래서 너무나 바쁠 인기 작가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진행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 쉬운, 인기인의 권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생각하기 쉬운 '권위의 부재'는 <가출>의 내용과 주제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새삼스레 '언행일치'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더군요. 

"아버지가 가출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 창작노트에서 밝혔듯 조남주 작가가 아버지를 여읜 지 정확히 한 달만인 2010년 11월 2일 밤에 시작했다는 이 소설, 그녀가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썼던 소설이지만 대중에게 공표된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는 소설을 시작한 지 자그만치 8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 소품 뒤에 여러 소소한 '작가'적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었네요. 그렇지만 이 느슨하게 완곡하면서도 굉장히 직설적인 소품 뒤엔 확연히 보이는 소소하지만은 않은 '소설'적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소설적 이야기들이 이 소설 자체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바로 위에서 말했던 대로 굉장히 직설적이기 때문이죠. 여전한 가부장 문화에서의 갑작스런 가부장의 부재, 그야말로 믿도 끝도 없는 설정입니다. 생각할 겨를도 행동할 겨를도 없는데, 작가는 이 신화를 전복시키기 위해선 '서서히'가 아닌 '한순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은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 사이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고 막내딸인 나는 당연히 아버지를 찾으려 사사로운 행동을 개시하지만 곧 가족들이 예전보다 자주 엄마만 있는 집에 들르는 걸로 귀결됩니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족들로 하여금 보다 긍정적인 화목의 길을 가게 해준 것으로 보이는 것이죠. 그런 한편 아버지를 찾으려는 행동의 주체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점과 아버지의 부재 후 알아차린 엄마의 '정확한 발음' 등의 모습에서, 가족의 중심이자 주체가 남성 아닌 여성이라는 인식 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는 인식의 변화가 보입니다. 

엄밀히 말해, 개인적으로 또 편집자의 안목으로 이 소설이 누구나 인정할 만한 훌륭한 문학적 성취를 이룩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훌륭한 문학적 성취'라는 게 다분히 문학적 권위에 기댄 고전적 의미의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단편소설 분량, 탄탄한 기승전결, 인간 삶의 한순간을 현미경 보듯 집어내되 그 자체로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 말이지요. 

반면, <가출>은 이 모든 조건들에 상관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듯 본인만의 길을 갑니다. 소설의 길이자 작가의 길. 치명적인 소재 한 가지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내는 것이죠. 현시대를 지탱하는 가부장제 문화, 가부장제 문화를 지탱하는 가부장, 그런 가부장의 출가 아닌 가출로 인한 부재라는 소재는, 사실 아버지와 가족을 향한 게 아닌 이 시대의 문제적 문제를 향한 날카롭고 뾰족한 날입니다. 아버지는 사라진 게 아니 죽은 것과 다름없고,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깨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가출(K-픽션 023)>, (조남주 지음, 전미세리 옮김, 아시아 펴냄,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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