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5 07:50최종 업데이트 18.11.16 10:11
특유의 격정적 언어와 날카로운 통찰로 사랑받아온 목수정 작가의 연재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은 매월 첫째, 셋째 주 목요일 <오마이뉴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찬 비가 도시를 하루 종일 적신 지난 일요일(11일) 오후 외출을 했다. 영화 보러.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 1호선 역에 들어서자, 콩코드와 샹젤리제, 샤를드골 에투알 등 파리 시내를 관통하는 1호선역들이 줄줄이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로 폐쇄되었다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이 역들은 금요일 밤부터 폐쇄된 상태였다. 11월 11일, 한국의 청춘들이 빼빼로데이를 기념하며 소박한 유희를 즐기는 동안, 파리의 샹젤리제에선 72개국의 정상들이 모여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던 것이다.

종전을 기념하는 날 즉, 마침내 도래한 평화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평화를 다짐하는 날, 시민들의 참여는 왜 이토록 철저히 봉쇄되어야 할까? 군대가 도열하고, 트럼프·푸틴·메르켈 등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과연 무엇을 도모하려 한건가?

봉쇄된 거리, 도열한 군대... 그 앞에서 낭송된 '평화'
 

지난 11월 11일 파리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뉴스/EPA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정반대이며, 민족주의는 애국주의의 배반입니다... 낡은 망령이 혼돈과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되살아나고 있음을 나는 압니다."

마크롱은 이날 연설에서 민족주의자임을 천명한 트럼프를 직접 겨냥했고, 그에 견주어 자신은 평화주의에 헌신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극대화시켰다.
 
"우리 모두, 여기서, 다시 한 번 맹세합시다. 평화를 다른 그 무엇보다 높은 곳에 놓겠다는 맹세를. (중략) 여기 모인 세계 지도자들은 아이들에게 우리가 꿈꿔왔던 그 세상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그 엄청난 책임감을 확인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지구온난화와 가난과 기아, 질병, 불평등, 무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인류의 숭고한(?) 염원들을 집합시켜놓은 듯한 이날의 연설에 대해, 프랑스 좌파 신문 <위마니떼>는 "전쟁을 후원하고, 독재자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기원하는" 마크롱 정부의 위선을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개선문 앞에 잠시 등장했다 바로 끌려간 3명의 페멘(FEMEN) 활동가들도 "가짜 평화주의자들(Fake Peace Makers)"이라는 문구를 몸에 새겨, 평화를 말하는 각국 지도자들의 허구를 폭로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은 2차 대전 종식 후 70여 년간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던 사실을 자축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벌여왔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세상이 펼쳐진 이후 빈부격차는 사상 유래 없이 커졌고, 이들은 자국에서만 전쟁을 안 했을 뿐, 뒤로 무기를 대며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지속해왔다.


이날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의 정상이 나란히 모여 평화를 축원하는 자리에서, 그나마 메르켈만이 덜 부끄러운 사람일 수 있었다. 그는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해 진상이 완전히 규명될 때까지 사우디에 무기 수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00년 전, 1천만 명이 총구 아래 쓰러져간 끝에, 마침내 독일이 손을 들어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프랑스인들은 거리를 가득 메우며 환호했고 함께 평화를 희구했다. 100년 뒤, 거리를 물샐 틈 없이 막아놓고, 70여 명의 타국 원수들과 도열한 군대 앞에서 '평화의 대서사'를 낭송한 마크롱의 연설에 귀 기울인 프랑스인은 얼마나 될까?

한계 없는 추락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이 지난 11월 11일 파리 1차 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 연합뉴스/EPA

 
바로 직전 마크롱은 나치와 협력한 비시 정부의 수장 페탕 장군을 "위대한 군인"이라 칭하며, 1차 대전에서 활약한 8인의 장군을 향해 경의를 바치는 행사에 그를 포함하겠다고 해 그야말로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다. 좌우정당들은 물론이고, 그 어떤 언론도 600만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페탕에게 경의를 바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수용할 수 없었다.

나치에 협력한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협력 언론은 싸그리 폐간했으며, 협력자 9천 명을 처형한 나라에서 그 나치 협력자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자가 바로 페탕이었다.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마크롱의 이 발언은 거센 후폭풍을 불러왔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발언은 철회됐지만 분노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난 여름 마크롱은 자신의 경호 담당 보좌관인 알렉상드르 베날라가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을 폭행한 사실이 알려져 내내 곤혹을 치렀다. 가을에는 두 달 사이 환경부, 체육부, 내무부 등 3명의 장관이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각을 떠났다.

환경부 장관 니콜라 윌로는 "더 이상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환경정책에 대한 마크롱 정부의 위선적인 태도를 고발했다. 프랑스 최초의 신자유주의자 대통령이었던 지스카르 데스탱마저도 고령(92)의 몸을 이끌고 방송에 등장해 "슈퍼 리치들을 점점 더 부유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의 정책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사실에 분노"를 표할 만큼 마크롱은 특유의 집중력으로 자본가를 위한 정책에 몰두해 왔다.

부자 감세,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 사회부문 예산 긴축... 그는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으로 나누는 자신의 이분법적 관점을 그대로 정책에 실현해왔다. 동시에 불평등을 줄이자는 연설을 거침없이 만인 앞에서 행한다.

그 결과, 11월 초 그의 지지율은 21%까지 추락했다. 나치 협력 군인 페탕에 대한 실언은 마크롱이 불안한 행보 끝에 날린 결정타였다. 급기야 사람들은 마크롱의 머릿속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묻기 시작했고, 그 물음은 시사주간지 <옵스>(l'Obs)가 정신분석가들에게 그의 심리 상태 진단해 달라고 의뢰한 것으로 실현됐다. 

"그는 자신도 속이고, 우리도 속이고 있다"
 

마크롱 반대 시위 연 프랑스 노동자들 2018년 10월 9일 프랑스 니스에서 노동자들이 마크롱 정부에 대한 반대 시위를 연 모습 ⓒ 연합뉴스/EPA

 
"그는 모든 유혹자들이 그러하듯,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공감능력을 연기하듯 과시적으로 보여준다. 마크롱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를 인정하는 것은 천재지변을 겪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그의 두려움은 자아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크롱의 경우처럼,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일 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알리 마구디)

"마크롱은 자신을 속이고 우리들을 속인다. 그는 마치 프랑스인들이 왕의 목을 치길 원하지 않았으며, 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인양 호도하려 한다. 그것은 철저한 실수다! 민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 누구 한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그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중략) ...나르시스트를 진화하게 만드는 것은, 뜻밖에도, 절망이다. 더 큰 허세를 부리거나 현실을 부정하며 그 부정에 갇히는 것보다, '절망이 갖는 능력'에 기대어 솔직히 한발자국 물러나, 슬픔과 비탄에 잠기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를 돕는 방법, 그리하여 우리들을 이 사이코드라마에서 나오도록 하는 방법은,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해야 할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롤랑 고리)

정신분석가들의 입에서 주저 없이 솔직한 진단과 처방들이 흘러 나왔다. 어쩌면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단 한사람, 그 당사자가 간절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12일 프랑스 교사들은 일제히 정부의 교원수 감축 결정에 항의하는 파업을 단행했다. 평화를 염원할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우리가 꿈꿨던 세상을 물려주자고 호소하던 대통령이 실제 행동에선 아이들로부터 교사들을 앗아갈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이것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

오는 17일 프랑스 전역에서는 '노란 조끼'라는 이름의 집회와 단체 행동이 준비 중이다. 정권이 잘못된 방향으로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나서서 잠시나마 세워주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룰이기에.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시민을 고달프게 하는 시스템이다. 늘 왕이 되고자 하는 원심력으로 권력자는 회귀하고, 시민들은 거기에 맞서 구심력으로 달려나가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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