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눈물 흘리는 엄마"의 호소, 끝내 못 들어준 이유

[取중眞담] '살인범 얼굴 왜 공개 안 하냐'는 당신에게... 강호순 사건부터 춘천 살인사건까지

등록 2018.11.12 17:36수정 2018.11.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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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이런 잔인하고 중대한 범죄에 대하여 살인 피의자의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한다면 저같이 피눈물 흘리는 엄마가 나오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10월 24일 발생한 춘천 살인사건 피해자 A씨의 어머니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의 일부다(☞ 바로가기 http://omn.kr/1cqbp).

지난 7일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 사건에 대한 설명과 글을 올린 사유를 자세히 듣고 인터뷰 기사를 썼지만, 이 부분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다(관련 기사 : 살인사건 3일 뒤, 죽은 딸의 카톡이 열렸다). 유족의 바람이 <오마이뉴스>의 기본 방침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유족과 의견 대립이 있는 부분은 별도로 쓰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마이뉴스>가 지난 2009년 10월에 만든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의 실명-얼굴 공개 등에 대한 매뉴얼' 일부를 소개한다.

1) 최종 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 이전에는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헌법상에 규정된 무죄추정의 원칙과 인격권-재산권에 근거한 초상권 보장).
2) 최종 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 이전에 사건 명칭을 정할 때 피해자의 이름 등 그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표현은 배제한다.
3) 법정에서 유죄가 최종 확정됐을 경우, 실명은 공개한다. 단, 얼굴 공개는 가해자의 이중처벌이 우려되고, 가해자 가족들에게도 연좌제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에 사안의 성격에 따라 결정한다.

  
강○○이 강호순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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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강호순. 사진은 2009년 4월 22일 강호순이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경기도 안산 수원지법 안산지원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당시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1부(재판장 이태수 부장판사)는 부녀자 10명을 살해한 혐의(살인, 성폭력범죄처벌법 위반, 현주건조물방화치사, 존속살해)로 기소된 강호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 연합뉴스

 
논란의 시작은 2009년 1월의 '강호순 사건'이었다(같은 해 7월 23일 항소심에서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이름을 밝힌다).

그가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라는 게 드러나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같은 날 그의 얼굴 사진을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 있는' 두 신문이 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뉴스는 순식간에 퍼졌다. 아니, 자료의 복제가 손쉬운 인터넷 시대이니 언론사 한 군데만 마음을 먹었다면 사진이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남은 것은 언론사로서 '새로운 흐름'에 부응하느냐, '기존의 원칙을 지키느냐'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많은 언론사들이 '새로운 흐름'을 선택했다.


<오마이뉴스>도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흉악범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는 취지의 표창원 당시 경찰대 교수(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기고문을 게재한 것도 그런 고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관련 기사 : 그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공익'). 결론은 위의 매뉴얼과 같다.

강호순 사건으로 '흉악범 사진 공개' 여론이 힘을 받은 후에는 경찰이 압송 도중 피의자의 모습을 공개하는 관행이 새로 생겨났다. 지난 2010년 3월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인사건의 범인 김길태(2011년 형 확정),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초등생 납치 성폭행을 저지른 김수철(2010년 형 확정)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체포될 때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사진도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는 서울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이 '남모를' 고민을 안겨줬다. CCTV 영상 공개로 대중들의 공분을 일으킨 사건의 범인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언론사들의 카메라 앞에 섰다.

이제 우리와 같은 길을 가는 언론사는 <한겨레>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론사 한두 군데 버틴다고 해서 '알고자 하는 대중들의 의지'와 '알리려고 하는 언론사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계속 남는 의문들이 있다.

하나는, 이미 체포돼 사회에 위협을 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중형을 기다리는 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형'이 온당하냐는 것이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법례를 따라 강도와 절도, 공금 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른 이의 몸에 상처를 내고 먹물로 글자를 새겨 전과를 표시하는 형벌이 있었다. 묵형(墨刑) 또는 자자형(刺字刑)으로 불린 벌은 주로 재범 이상의 중죄인에게 내려졌다.

강도범 얼굴에 '강도' 두 글자를 새기고 먹물이 깊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3일이 지난 뒤에 풀어주는 식이었다.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찍는 이 형벌의 야만성을 직시한 군주는 조선의 영조였다. 1740년 그는 형구를 거둬 불태우고 법의 폐지를 명한다.

범죄자의 신상 공개는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에 한해 이미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신상 공개의 처벌조건을 명문화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집단 감정에 따라 공개 대상을 임의로 선정하고 언론을 통해 '전시'하는 것은 오래 전에 없어진 '묵형'의 부활이 아닐까? 매년 발생하는 900건 이상의 살인 사건 중에서 경찰이 제시하는 범인 공개와 비공개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 역시 많은 언론이 이미 제기해온 문제다.

또 하나의 의문은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손가락질당할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충분한가'이다. 춘천 살인사건 피해자의 모친과 인터뷰할 때 마음에 걸렸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생전의 피해자는 두 차례 강원도의 집을 찾아가며 가해자 가족들과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피해자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학력을 속인 정황이 드러났는데, 가해자의 부모들은 사건이 터진 후에야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피해자의 장례식이 있던 날, 가해자의 어머니는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간신히 한마디를 뗐지만, 유족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 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 댓글에는 가해자의 가정교육이나 성장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도 간혹 올라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 가족이 둘의 교제를 허락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 가해자 집안의 '반듯한 집안 분위기'였다.

그런 것을 떠나서 스스로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28세 청년에 대한 가정교육을 문제 삼아서, 그의 신상을 공개하고 부모들까지 욕보이는 것이 유사 범죄에 대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피해자의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살인자로 키운 그놈의 부모 또한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지금으로서는 살인 피의자의 가족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용서할 마음도 전혀 없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춘천살인사건 #취중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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