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술 먹고는...' 이성계도 염려한 음주운전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623년 전에도... 술 먹고는 절대 뭔가를 몰지 마라

등록 2018.11.12 12:10수정 2018.11.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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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만취 운전자가 모는 승용차에 치여 뇌사 상태로 투병하다가 11월 9일 숨을 거둔 윤창호 상병의 영결식이 11일 거행됐다. 휴가를 받고 기쁜 마음에 부대를 나섰을 청년이 당한 참혹한 일에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

언론보도의 표현처럼, 윤창호 상병은 '음주운전은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리고 떠났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고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한결같을 것이다.

음주운전의 위험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조됐다. 그런데도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청의 전신인 치안본부가 1970년대 후반에 음주 감지기(음주 여부만 확인)를 도입한 데 이어 1980년 6월부터 음주 측정기를 단속 현장에 투입한 사실은, 당시에도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치안본부는 11일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음주운전 사고를 방지키 위해 음주 감지기(주량 측정기) 4백 대를 미국으로부터 도입, 전국 경찰에 배정하고 음주운전자에 대한 단속을 강력히 펴기로 했다. 음주운전 사고는 최근 몇 년 사이 '마이카 붐'을 타고 오너 드라이브가 늘어나면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 지난 79년 한 해 동안 2006건의 음주운전 사고가 발생, 150명이 숨지고 1711명이 다쳤다." - 1980년 5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첫 문장의 '음주 감지기'는 지금의 음주 측정기다. 종전 습관대로 음주 감지기로 불렀을 뿐이다. 음주 측정기는 1980년 6월 11일 도입되고, 6월 20일부터 단속 현장에 투입됐다.

예나 지금이나 골칫덩어리 음주운전
 

오늘날의 음주 감지기. ⓒ 경찰청 홈페이지

   
음주운전의 위험성이 1970년대 후반에 처음 지적된 것은 아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항쟁으로 유명한 196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 2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공병부대 운전병이 술을 마시고 과속으로 달리다가 8m 아래 하천에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 1명, 중상 18명, 경상 22명이 발생한 사고도 있었다.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음주운전의 위험성은 지적됐다. 한국전쟁 발발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1일 <동아일보>는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서울시 경찰국에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월 한 달 동안의 시내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80건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14명이 사망하고 72명이 부상하였다 한다. 그런데 사고 원인은 운전수의 음주운전, 속도 초과 등과 일반인의 부주의로 인한 것 등이라고 한다."
 
사고 원인으로 음주운전을 제일 먼저 거론했다. 자동차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절에도 음주운전이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1967년에 발생한 자동차 전복 사고. ⓒ 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4일에는 부산 영도교 인근 해상에서 술 마신 선장이 자기 선박으로 다른 선박의 측면 중앙을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도 긴급 출동한 수상경찰이 20분 만에 침몰 선박의 승무원 12명을 구조해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배에 실려 있던 거액의 해산물은 건지지 못했다. 1951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는 "침몰선에는 어획한 5백여 상자의 어류가 있었"다면서 "이번 피해는 약 1억 5천여만 원에 달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문맥상, 이 금액은 추정치다.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만한 가치의 해산물이 바닷속으로 도로 돌아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음주운전 사고는 있었다.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도 존재했다. 1929년에 발생했던 유명한 음주운전 사고의 피해자인 서석란(17)의 진술에서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다.


3·1운동 10년 뒤인 1929년 11월 4일, 주점 직원인 서석란은 동료 김소련(17)과 함께 경주군청 직원 이귀돌(22) 일행의 불국사 나들이에 동행했다. 이들이 타고 간 차는 일종의 렌터카였다. 지금과 다른 게 있다면, 회사에서 운전사까지 파견했다는 점이다.

그해 11월 6일자 <동아일보>에 언급된 운전사의 이름은 강본무문(岡本武文·22)이다. 일본이 창씨개명 시행을 위해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때가 1939년이므로, 강본무문은 그 이전에 자발적으로 일본 성명을 선택한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한국에 이민 온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정황상 후자에 더 가깝다. 일본인이었다면, 오카모토 다케후미(혹은 다케부미·다케야스)로 불렸을 것이다.

이귀돌 일행은 서석란 일행과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취해 있었다. 이들은 운전사와 함께 불국사에 가서도 계속 마셔댔다. 이때부터 서석란은 가슴을 졸였다. 운전사까지 술을 입에 댔던 것이다. 그는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까지 했다. 겁이 난 서석란은 술 한 되를 몰래 숨겼다. 하지만 오래 감추지 못했다. 이귀돌 일행과 운전사가 그 술도 찾아내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운전사가 술을 마신 뒤부터 안전을 염려하기 시작한 서석란의 모습에서, 음주운전을 위험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드러난다. 자동차 이용자의 범위가 적어서 경각심이 널리 확산되지 않아서 그렇지,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주운전을 다들 경계하고 있었다.

서석란의 진술에 따르면, 불국사를 떠나려고 시동을 건 직후부터 차가 이상했다. 차가 똑바로 전진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 쏠리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서석란은 "대단히 불안"했다고 한다. 결국 차는 전복됐고 이귀돌은 즉사했다. 나머지 네 남자 중 셋은 앞니가 전부 빠지거나 경상을 당했고, 서석란 일행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중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에 운전사는 손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술 취한 손님들이 운전을 방해하고 핸들에 달려드는 바람에 차가 전복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운전사도 과음했다'는 서석란의 진술을 크게 보도했다. 기사 제목도 '운전수도 음주, 처음부터 염려'다. 부제목은 '손님이 운전 방해한 일 없소'다. 더 이상의 보도를 찾지 못해, 이 사건의 처리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순박하던 신하를 잃은 이성계의 당부
 

2008년 1월 14일 대마도(쓰시마) 항구에서 찍은 ‘음주운전 박멸’ 포스터. ⓒ 김종성

  
음주운전에 대한 공포심은 아주 오래된 감정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있었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도 그랬다.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에도 존재했던 감정이다.

윤창호 상병 사건으로 인해 청와대 청원이 늘어가자, 지난 10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음주운전을 살인행위로 규정하면서 엄중 처벌을 주문하는 일이 있었다. 유사한 일이 623년 전 늦가을에도 있었다.

조선 건국 3년 뒤인 1395년 11월 26일(음력 10월 14일)이었다. 이날, 주상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음주'운마' 문제를 거론했다. 3일 전에 벌어진 사고 때문이었다.

11월 23일(음력 10월 11일)이 이성계의 60회 생일이었다. 이날 잔치에서 재상급인 홍영통이 과음으로 만취 상태가 됐다. 이 날짜 <태조실록>에서 '심히 취했다'는 심취(深醉)란 표현을 쓴 것을 보아, 혈중 알코올 농도 0.1 퍼센트는 충분히 넘었을 것이다.

잔치가 끝난 뒤 홍영통은 만취 상태였는데도 말에 올라탔다. 말이 놀랐다는 기록을 볼 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던 듯하다. 이 상태로 어느 정도 달렸다. 그런데 술에 취해 몸을 자꾸 흔드는 운전자가 불편했던지, 말이 몸을 크게 움직였고 이로 인해 홍영통은 말 위에서 떨어졌다. 위 날짜 실록에 따르면, 홍영통은 순박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인데도 음주운마에 자신감을 보이다가 운명한 것이다.

이 사건에 놀란 이성계가 소집한 자리가 위의 26일 모임이다. 하필이면 자기 생일에 참석했던 신하가 귀가 중에 변을 당했으니, 충격이 한층 더 컸을 것이다.

음력으로 태조 4년 10월 14일자(양력 1395년 11월 26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날 이성계는 '음주 후에는 절대로 말을 타지 말라'는 뜻에서 신하들에게 물건 하나씩을 하사했다. 대나무로 만든 요여(腰輿, 작은 가마)였다. 술 마신 뒤에는 요여꾼을 불러 요여를 타고 귀가하라는 의미였다. 제발 술 먹고 '운전대' 잡지 말라는 당부였다.

음주운마건 음주운전이건, 음주 상태에서 뭔가를 모는 것에 대한 우려는 지금이나 과거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두려움은 1970년대에도 있었고 1950년대에도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인 말을 타던 시대에도 있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대나 기본적으로 말을 타던 시대였으므로, 이성계가 느낀 우려는 그 이전 시대에도 항상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음주운전에 대한 공포심이 이처럼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도, 이 문제는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윤창호 상병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경종을 울렸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 웬만한 노력과 법적 강제로는 고치기 힘든 고질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윤창호 #음주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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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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