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센트럴파크, 선정릉의 만추... 서두르세요

수령 500년 은행나무와 정현왕후 능으로 가는 소나무 숲

등록 2018.11.12 10:06수정 2018.11.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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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의 500년 된 은행나무 ⓒ 변영숙

 
가장 비싼 왕릉

차단막이 올라가고 차량번호 자동인식 시스템을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료는 5분에 400원이라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1시간이면 4800원이다. 너무 비싸다. 몇 년 전 주차장을 짓기 전 주차료가 비싸다고 하니 '땅값이 비싸서 어쩔 수가 없다'던 주차요원의 말이 떠오른다.


선정릉은 아마 조선 왕릉 40기 중 가장 비싼 금싸라기 땅을 차지하고 있는 왕릉일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 테헤란로에서 불과 5분 거리인데다 주변에는 고급식당과 호텔, 상점, 사무실 등이 즐비하다. 강남 중에서도 노른자 위에 위치해 있으니 오죽 비싸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매표소로 향했다. 입장료 1000원. 아래에는 주민할인권과 점심 정액권과 한달 정액권에 대한 설명문이 붙어 있다. 놀이시설도 아니고 찜질방도 아닌데 정액권이라니. 조금 생소하지만 자주 찾는 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차원인 듯하다. 그만큼 공원처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500년 된 은행나무
  

선정릉의 은행나무 선릉 재실 옆의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 가을이면 주변 산수유 나무등과 어울려 최고의 자태를 자랑한다. ⓒ 변영숙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능인 선릉과 왕비 정현왕후의 능, 그리고 11대 중종의 능인 정릉을 합해서 선정릉이라 부른다. 선정릉 돌담길 아래에도 노란 은행잎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이 계절만큼은 덕수궁 돌담길 못지 않다. 바쁜 걸음도 멈춰서게 만든다. 

돌담길 아래 은행나무 가로수와 함께 선정릉의 큰 자랑거리는 재실 옆에 서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우람한 은행나무다. 재실의 지붕을 훌쩍 넘어서는 둘레 5.5미터, 높이 24미터의 노거수는 11월이면 황금빛으로 물든 화려한 자태를 선보인다. 

수양버들처럼 땅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자못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또 왕릉 재실 옆에 있어서인지 그 기품과 위엄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은행나무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단연 샛노랗게 물이 드는 11월 초이다. 이때쯤이면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들도 한번쯤은 멈춰서서 하늘 높이 뻗은 가지와 둘레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선릉, 시신 없는 빈 무덤 
  

선릉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능인 선릉의 정자각. 그너머 라마다 서울 호텔 건물이 보인다. ⓒ 변영숙


은행나무를 지나 성종의 능인 선릉으로 향한다. 홍살문까지 길이 궁색하다. 애초 왕실 묘역이 잘려나간 느낌이다. 선릉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서쪽 언덕에 제9대 성종의 능이, 동쪽 언덕에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
  

선릉 선릉은 임진왜란 때 외구에 의해 도굴되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 변영숙

 
선정릉은 유난히 시련을 많이 겪었다. 선릉의 능침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도굴되었고, 시신은 도난당했다(혹자는 불태워졌다고도 한다). 선조는 성종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시신과 함께 묻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다시 관에 넣어 왕릉을 수습했다고 한다. 선릉은 시신 없는 빈 무덤인 것이다. 혹자는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묻었다고 하는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홍살문과 정자각은 인조 3년에 화재로 다 타버렸고 그 이듬해에는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능침이 타 버렸다.
 

선정릉의 소나무 숲 ⓒ 변영숙

 
선릉의 곡장 아래로 난 숲길은 정현왕후 능으로 이어진다. 정현왕후 능은 비스듬한 언덕에 선릉보다 소박하게 조성되었다. 그 일대의 언덕은 온통 소나무 숲이다. 선릉의 소나무들은 유달리 호리호리하고 맵시가 좋다. 선릉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가장 멋드러진 곳이다.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와 중종의 능인 정릉으로 향한다. 선정릉에서 가장 잘 조성된 산책로이다. 산책로에는 늦가을로 접어든 듯 낙엽들이 융단처럼 깔려있다. 삼삼오오 가을 햇살을 즐기는 시민들의 표정이 가을숲만큼이나 그윽하다. 
  

선정릉의 소나무숲 정현왕후 능에서 정릉으로이어지는 길 ⓒ 변영숙

 
산책길이 끝나는 곳에 중종의 능인 정릉이 자리잡고 있다. 애초에 중종은 둘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묻힌 서삼릉 희릉에 함께 묻혔으나, 세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가 능의 위치가 안 좋다고 지금의 정릉자리로 옮겼다. 자신도 중종과 함께 묻힐 생각이었다. 

남편 중종이 다른 여자와 함께 묻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리라. 또 자신이 왕의 옆에 묻힘으로써 계비가 아닌 정비의 지위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문정왕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릉의 지대가 약해 홍수로 인해 피해가 잦아 그 옆에 능을 조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태릉에 묻혔다. 
  

선정릉 숲 ⓒ 변영숙

 
조선 왕릉은 단순히 죽은 왕들의 무덤이 아니다. 삶과 죽음, 희로애락, 욕망, 권력, 증오, 투쟁, 암투, 질투 등 모든 인간사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왕릉은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인간 세상인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 만추의 계절 조선왕릉을 찾는 또 다른 이유이다. 

봉은사, 모과와 산수유열매가 익어가는 절
  

봉은사의 가을풍경 봉은사에 모과나무 ⓒ 변영숙

 
선정릉에서 멀지 않은 곳 봉은사는 또 다른 가을 풍경을 선사한다. 선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국사가 지은 절로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정하고 중창불사하고 이름도 견성사에서 봉은사로 바꾸었다. 코엑스와 아셈타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봉은사는 선정릉과 마찬가지로 흔히들 도심 속의 오아시스라고 한다.
 

봉은사 가을풍경 절 곳곳에서 빨간 산수유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 변영숙

 
이 오아시스 같은 절 봉은사에서는 붉은 단풍과는 또 다른 가을 풍경이 펼쳐진다. 법왕루 가기 전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족히 200년 이상은 된 듯하다. 이 나무가 가을이면 주먹만한 모과 열매를 피어내는 것이다. 가지마다 커다란 모과가 달린 모습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풍경이다.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과 영산적 근처에는 산수유의 빨간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누런 나무잎 사이에 숨은 듯 매달린 산수유 열매가 지천이다. 봄에 봉은사 일대를 밝히던 노란 산수유 나무가 가을이면 새빨간 열매를 맺는 것이다. 

봉은사 판전
 

봉은사 판전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친필이다. ⓒ 변영숙

 
봉은사에서는 '판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봉은사 판전은 남호 영기 스님과 추사 김정희가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을 안치하기 위하여 지어진 전각으로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후에 유마경, 불족인 등을 더 판각하여 현재 3438점의 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판전에 유독 관심이 가는 이유는 판전 편액이 추사 김정희의 생전의 마지막 친필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서체로 규정지을 수 없는 추사만의 담대하면서도 자유로운 필체가 고스란히 편액에 담겨 있다.  

강남에서 고즈넉한 가을을 보내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선정릉 #봉은사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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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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