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정말 북학파일까

[서평] 강명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등록 2018.11.13 09:13수정 2018.11.1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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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허생전>은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국어교과서로 접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선 후기를 다룬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파, 그 가운데 특히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주창한 북학파의 입장을 잘 대변한 작품으로 널리 소개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 중 허생이 도고(都庫, 독점상업)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일본의 나가사키 지역으로 곡식을 보내는 장면이 그 근거였다. 나아가 이는 우리 역사 역시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이론(이른바 '내재적 발전론' 또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좋은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과연 이것이 합당한 해석일까? 그리고 <허생전>을 쓴 연암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일까? 기존의 설명대로라면 허생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은 50만 냥을 바다에 쓸어 넣고, 일체의 금전을 소유하지 않은 채 다시 남산골 아래 가난했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대체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종전의 해석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그 텍스트를 읽는 자들의 사유방식과 시대상황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만큼, <허생전>을 둘러싼 기왕의 담론 역시 서구식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자 공기처럼 당연시 여기는 오늘날 우리의 천박한 사고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연암이 꿈꾼 사회가 무엇을 지향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허생전>을 연암의 '아나키즘 사상'이 반영된 '반역적 작품'임을 규명 한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강명관, 2017)은 여러모로 주목되는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허생전>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선, 조선 후기 역사를 읽어내는 우리의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촉구하며 다음과 같은 독법을 제시한다.
 
이제 <옥갑야화>와 <허생>은 동시대의 맥락에서 좀 더 충실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실학파나 북학파란 어휘를 일단 지우고, 조선 후기를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보는 시각, 나아가 조선 후기에 발생한 상업의 발달과 화폐의 사용에서 자본주의적인 '맹아'를 찾으려는 노력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요는 연암이 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던 시기의 여러 사회적·경제적 현상을 탐색하면서 작품을 읽는 것이다. 곧 동시대적 콘텍스트 위에서 작품을 해석하되, 그것이 지금-이곳의 문제와 어떻게 접속하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허생>에 대한 재래의 해석이 내장하고 있는 욕망은 근대의 완성, 달리 말하자면 국가-자본의 권력이 온전하게 관철되는 사회의 구성이다. '서구의 근대'로 해독된 조선 후기사에서 조선은 언제나 국가-자본이 결핍된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국가-자본은 지나치게 충족되고 있다. 지금-이곳은 국가-자본 권력의 결핍이 아닌 충족으로, 미완성이 아닌 완성으로 인해 사회가 붕괴되고 인간의 삶이 파괴된다. 허생의 섬을 닿을 수 없는 몽상으로 해석하여 한계로 단정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어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20쪽)

저자는 이러한 독법에 충실하게 논의를 전개해나간다. 즉, 연암이 <허생전>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소재들을 택했으며 왜 그러한 소재를 택했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의 책 표지 강명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휴머니스트, 2017 ⓒ 휴머니스트


가령 저자는 서울의 으뜸가는 부자 변씨가 허생의 요구에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1만금을 내주는 장면을 분석하면서 조선 후기에 동일한 모티브의 이야기가 다수 퍼져있었음을 실증한 다음, 이를 통해 화폐에 선행하는 윤리적 가치가 존재하며 화폐나 경제는 그러한 가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전근대인의 경제관념을 도출해낸다.

이는 "화폐가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관통하면서 전일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123쪽)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관념이자,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 편 도처에서 확인되는 연암의 경제관념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허생전>에 나타나는 다양한 키워드와 소재들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찾아내고, 연암 자신이 남긴 기록 및 연암과 교유했던 주변 인사들의 기록까지 폭넓게 섭렵하며 그 맥락을 찾아나가는 저자의 독법은, 연암의 문제의식에 도달하려는 저자 자신의 치열한 노력이자 독자의 '읽는 맛'을 돋우는 소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허생전>을 '연암의 아나키즘'이 반영된 작품이라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점은 철저히 <허생전>의 텍스트와 콘텍스트(context) 그 자체에 근거한다. 예컨대 허생은 도고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다음, 생뚱맞게도 군도로 전락한 농민들을 이끌고 무인도로 향한다. 왜 그랬을까?

이와 관련해 저자는 조선시대 '무인도'가 지닌 '콘텍스트'에 주목한다. 조선전기 이래 사료에 묘사된 무인도는 국가권력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었던 민중의 이상향이었고, 국가는 지속적인 무인도 수색을 통해 민의 국가체제 이탈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전근대 시기에는 교통의 미비로 인해 국가권력의 촉수가 닿기 어려운 공간들이 실재하고 있었다. 아마 연암은 이 같은 현실에 착안해 허생과 군도의 무인도행이라는 설정을 탄생시켰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아울러 그러한 설정의 이면에는, 당시 여하한 개혁도 거부하고 있었던 '경화사족(京華士族) 체제'를 향한 연암의 '절망'과 '반역적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었음도 물론이다(140∼161쪽).

한편, 무인도에 도착한 허생은 홍길동과 달리 자신이 왕이 되지 않을뿐더러 일체의 권력관계와 차별을 폐기해버린다. 이어 다른 배를 모두 불태워 섬을 의도적으로 고립시키고, 은 50만 냥을 바다에 수장시켜 섬 안의 모든 화폐를 폐기한다. 심지어 문자마저 "화의 근원"이라 지목하고, 섬 안에서 글을 아는 사람을 골라 자신과 함께 섬을 떠난다.

저자는 허생의 이러한 행위가 지닌 상징성을 '연암의 아나키즘'이라는 시각으로 읽어낸다. 무인도가 기성의 사족체제(국가)와 절연된 공간을 상징한다면, '화폐'와 '문자'는 경제 권력의 집중과 이데올로기 창출을 매개하는 수단으로서 지배 권력의 원천이자 마땅히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 보았던 연암의 시각이 허생의 행위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언어'와 '문명'을 일체 부정했던 노자(老子)의 아나키즘 사상을 방불케 한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허생은 기존의 사족체제와 절연된 섬을 선택하여 화폐와 이데올로기를 폐기한다. 그는 배를 불태워 의도적으로 섬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섬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

섬은 오른손을 쓰는 습관과 연장자에 대한 양보만 남아 있을 뿐 과거의 모든 권력적 지배관계가 폐기된다. 섬은 토지의 공유 아래 농업만 존재하는 사회다. 허생의 섬에서 구현된 것은 연암의 아나키즘이다. 연암의 사고 저 깊은 곳에는 아나키즘을 실현하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242쪽)

<허생전>을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연암이 그토록 <옥갑야화>와 <허생전>의 출처를 은폐하고자 했던 의도 역시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저자가 책의 6장에서 분석하고 있다시피 연암은 이중삼중의 책략으로 <허생전>의 출처를 은폐하려 했다. 마치 자신이 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연암의 동료였던 박제가가 <허생전>을 두고 "(그동안의 개혁책에서)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들어 있다"라고 평했던 것도 이와 관련해 음미해볼 만하다(361∼362쪽). 요컨대 이러한 정황들 역시 <허생전>을 '연암의 아나키즘'이라는 시각으로 읽어낸 저자의 결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조선 후기에 새롭게 도입된 부세제도인 비총법(比摠法)에 대한 이 책의 서술은 역사학계의 최신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조선후기 군도의 창궐 배경을 설명하면서 비총법을 통해 농민에 대한 국가적 수탈이 강화되고 지방관과 아전들의 탐학이 촉발된 것으로(168쪽)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계에선, 국가가 수세 대상 토지의 지역별 총액을 사전에 정하는 비총제의 특징이 국가적 수탈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규정할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통칭 '북학파'로 규정하는 통설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즉,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의 교유 관계가 일찍부터 형성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국가관, 사회관, 상업관의 측면에서 각자의 생각 역시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담헌과 연암의 국가관 및 사회관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담헌의 경우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여겨 강력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반면, 연암은 아예 국가권력 자체를 부정하고 토지 공유의 수평적 소농사회를 지향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요컨대 북학파란 명사로 묶이는 그룹은 당연히 내부에 사상적인 차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냉정히 말해 북학파란 명칭을 설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368쪽)

글쓴이가 보기에 북학파라는 규정의 자의성을 밝힌 이 대목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빛나는 학술적 성취가 아닌가 한다. 그동안에는 조선 후기 일군의 지식인들을 '실학파'로 규정한 다음, 이들의 성향을 농업과 상업, 학문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종래의 프레임을 뛰어넘어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 내부의 차이를 '체제 지향'이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기준으로 읽어내는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서 체제 지향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갈등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도 있다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되는 대목이다. 차후에는 그것이 가장 격렬한 형태로 나타났던 근현대 시기의 양상과 비교사적 검토를 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데, 이 책의 성취는 단지 학문적 성과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표방한 것처럼, <허생전>의 (콘)텍스트를 오늘의 현실에 비추는 예리함이 책의 곳곳에서 번뜩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향한 저자의 비판이 매섭다. 예컨대 저자는 허생이 섬의 모든 배를 불사르는 장면을 두고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무역은 제한 없는 상품의 이동을 말한다. 세계 자본주의 아래에서 상품의 무제한적 이동은 인간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멸로 이끈다. 농산물과 에너지의 대륙 간 이동은 자본과 이윤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무역은 지역에 뿌리박은, 인간과 대지가 호흡할 수 있는, 인간이 대지와 교감하는, 순환 가능한, 오염시키지 않는, 소농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 농업이 아니다. 농업은 이미 거대한 단작과 유전자 조작과 화학약품의 포로가 되었다. (…)

수천 킬로미터 밖에 사는 사람들의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다는 것, 대규모의 벌목으로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된다는 것, 자원 개발로 인한 이익이 고스란히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지역 원주민이 살던 곳에서 축출되고 빈곤에 시달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역관계를 끊거나 최소한의 무역을 하는 것이고, 스스로 고립되고 단절되는 것이라고.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와 철저히 결별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고립'과 '단절'이 불안하게 들린다면 다른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곧 '지역화'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에너지로 지역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허생의 섬은 단절된 곳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섬은 지역화의 결과다. (203∼204쪽)

연암이 <허생전>을 통해 당대를 넘어서려 했듯, 저자 역시 <허생전>의 재해석을 통해 강고해 보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현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활용하기에 바빴던 현대인들에게 새삼 역사야말로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들'의 보고(寶庫)임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역저다.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 강명관의 파격적인 허생 강독

강명관 지음,
휴머니스트, 2017


#연암 박지원 #허생전 #아나키즘 #북학파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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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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