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강제노역' 했을까

수감자 99%가 ‘사상범’...군수공장서 군수용품 생산....과장된 수치도 있어

등록 2018.10.22 08:54수정 2018.10.2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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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20일 열린 '서대문형무소 공간의 확장과 활용방안'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 신상미

 일제강점기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지사들은 감방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이들은 얼마만큼의 식사량을 배급받고, 어떤 일을 하면서 형기를 보냈을까. 독립운동가들, 즉 사상범들이 형무소 안팎에 설치된 공장에서 일반 수형자들과 함께 강제노역 즉 수인노동을 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기존엔 독립운동가 특히 이름이 잘 알려진 '거물급'이 형무소 내 공장에서 노역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들은 보통 '독방'에 수감되는 데다 '사상범'이므로 일반 범죄자와 섞어놓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2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형무소 공간의 확장과 활용방안' 학술 심포지엄에 참석한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공장 노동을 한 수감자 중에 독립운동가도 포함돼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단순 잡범만 가서 노동했다고 하면 꼭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에 공장을 복원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이종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독립운동가의 감옥 생활을 담은 수기나 구술기록에서 관찰되는 3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일제강점기 감옥 연구 전문가인 이종민 연구교수는 "고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고, 보통 입감 후 3개월 뒤부터 노역을 시작하는데 수감된 독방 내에서 혼자 장갑이나 그물짜기를 한 경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독방 수감자는 공장 노역을 못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이어 그는 "세번째로 이소가야 스에지(함남 함흥에서 조선인들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으로 검거됨)나 이규창(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아들) 지사처럼 공장노역에 투입되는 경우가 발견된다"면서 "모든 수기에서 관찰되는 것이 굉장히 굶주린다는 것이다. 사상범은 밥의 양이 너무 적어서 온통 먹을 생각 뿐"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공장노역을 나가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가 있다. 수감자의 식사는 개인별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배급했기 때문이다. 또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의 욕구 때문에 대부분의 수형자들은 공장 취업을 원했다고 한다. 공장에서 수감자들은 군검용 호구, 책상·의자 등의 가구, 폭탄·폭약 상자, 군복·의류 등을 생산했다. 

한 수기에선 '전향'을 하지 않았음에도 형무소 내에서 병자를 간호하는 '간병부' 일을 맡게 된 사례가 발견됐다. 간병부는 전시 말기에 가장 임금이 높고 활동의 자유가 약간 있어서 수감자들이 선망하는 보직이었다. 이러한 일을 가장 혹독하게 감시하고 처우해야 할 독립지사에게 맡겼다고 보기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형무소의 특징 속에서 감안해야 할 것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지력이나 지도력에서 일반 범죄자보다 역량이 있는 분들"이라며 "간수의 재량에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형자와 간수 사이의 관계에서 발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이준식 관장은 "사상범은 경찰조사에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 때문에 미결수가 되면 죽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몸으로 밖에 나가서 노동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면서 "또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1930년대 말엔 서대문형무소 전체 수형자의 98%가 국영공장에 취업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제가 과장한 수치로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는 절대 다수가 사상범이었는데 과연 그 정도의 수치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피력했다.   

이준식 관장은 그러면서 "노역에 동원된 수인들은 장기수가 아니라 건장한 청년들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신상미

 이에 이종민 교수는 "서대문형무소는 사상범을 주로 두는 형무소로 규정돼 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수형자가 다 사상범은 아니었다"면서 "1930년대 말엔 젊은 경제사범이 많이 투옥됐다. (1939년에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판 죄 등 사소한 죄목으로 투옥된 이들이 외역을 나간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외역이란, 일제가 1943년 이후 수감자도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수인들을 '형무소 보국대' '작업대'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각소로 원거리 장기 파견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이 관장과 이 교수 모두 해외 파견 등의 외역에 동원된 수감자 가운데 사상범 같은 독립운동가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꼽았다. 

외역은 일본 해군의 요청으로 7차에 걸쳐 전국 17개 형무소에서 차출한 2000명의 조선인 수형자들을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에 보낸 '남방파견 보국대'가 유명하다. 수형자들은 광산 채굴, 비행장·항만 건설 등에 동원됐으며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현지에서 사망, 해방 뒤 귀국선에 탄 수형자는 200여 명에 불과했다. 특히 노동력을 상실한 수형자들을 산 채로 묻거나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인갱'이 유명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일제는 수인 노동, 즉 수용자의 노동력 활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 일제는 19세기 말 이래로 전쟁을 지속해 오면서 수인 집단의 노동을 활용하는 데 익숙했다. 이 교수는 "수인노동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이 사회에 알려지기 어렵기 때문에 보안에 상당히 유리했다"면서 "일제시기 형무소는 이름 없는 대형 직업학교, 국영 공장이라고 불렸다. 원래 수인은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한 예가 많지만, 1930년대 후반엔 전쟁이 확대되면서 소화기 계통 질환으로 많이 죽었다. 굶주린 수인들이 아무거나 먹다가 탈이 나서 사망한 거다. 많은 인원들이 도주했다"고 설명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가 만든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자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 내 형무소 가운데 최대 수형자·간수가 있던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운영됐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에 따르면,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에 의해 미결 사상범 중심의 수용 감옥으로, 대전형무소는 기결 사상범 수용 감옥으로 설정됐다. 일반 범죄자와 함께 섞어서 수용하면 이들에게 독립운동의 영향이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한 일제의 조치 때문이다. 

1908년 개소한 서대문형무소는 초기엔 6~7개 동의 목재 건물과 아연판 담장으로 만들어졌으나 1930년대 중반이 되면 붉은 조적식과 견고한 콘크리트 건물, 외곽에 4m 높이의 담장과 10m 감시탑으로 절대적 권위를 드러내면서 외형적 확장을 완료했다. 이러한 형태는 해방 뒤 '서울구치소'로 개칭되고 의왕으로 이전해간 1987년까지 지속됐다. 

개소 초기 1600㎡에 수용인원 500여명에 불과했던 공간이 1936년이 되자 5만5000㎡에 수용인원 3000여명에 육박했다. 당시 전국 28개 감옥 총 수감인원 1만9358명 가운데 약 18%에 해당하는 인원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다. 특히 3.1운동 직후 수감자가 폭증하면서 1평에 8~9명이 수감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감옥의 수용 밀도는 언제나 기준을 초과했고, 따라서 수감자들은 잠도 교대로 자면서 자기 순번이 올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이러한 과밀 수용으로 인해 하절기에 특히 고통스러웠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죄명 분포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현존하는 서대문형무소의 수형기록카드를 통해 죄명이 확인되는 인물은 총 4630명이다. 이들의 38가지 죄명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사상 범죄'다. 치안유지법, 보안법, 국가총동원법, 소요, 출판법 위반 등이 그것이다. 전체 4630명 가운데 18명을 제외한 4612명이 사상범으로, 약 99.6%에 달한다. 그동안 서대문형무소 역사 유적이 일제시기 일반 잡범도 수용된 곳이라는 평가 절하가 일부 있어 왔으나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시인 이상이 졸업한 일제의 관립학교) 수업시간에 마포형무소 벽돌공장으로 견학을 갔다. 학생들의 에세이가 다 남아 있다"면서 "원래는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것을 물도 멀고 모래도 없어서 한강과 가까운 마포형무소로 이전시킨 거다. 우리나라 최대의 벽돌공장이 있던 데가 바로 마포"라고 설명했다. 김정동 교수는 그러면서 "유도·검도·태권도복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들었다. 운동선수들뿐 아니라 아마추어들도 그걸 다 입었다"고 덧붙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1913년 서대무형무소를 돌아본 뒤 소장과 간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내렸다. "헛되이 옥사의 완비를 추구하거나 수인에게 양식을 보급하여 하층의 민중생활보다 낫다는 인식을 주지 말 것이며, 혹독함을 잃지 않으며 온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 교수는 "이것은 열등 처우의 법칙으로, 당시에 총독 이하의 군벌 통치하에선 조선 민중이 거칠고 민도가 낮기에 이들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깔고 있어 태형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전국의 수형자들은 동절기엔 하루 7시간을, 하절기엔 11시간을 강력한 감시통제 속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동료들과 대화는 금지됐고, 시선은 자기 손끝을 봐야 했다. 같은 시기 일본 내에선 형무소 내 처우에 대한 불만이나 공장 작업 선택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는 수용자들의 청원이 많았으나 식민지 일제하 감옥에선 그런 청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행형제도의 혹독함을 지적하면, 일제는 수형자들에게 독서나 음악은 제공하지 않지만 수형자들의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 집단 라디오 체조를 실시한다고 대응했다. 이 교수는 "서구의 동시기와 비교하면 일본의 행형 통제는 군대식 통제로, 수형자들은 팽팽한 긴장속에 하루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감옥 #서대문형무소 #강제노동 #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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