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30 13:48최종 업데이트 18.09.30 13:48
 

의열단 박재혁 의사. 박재혁(朴載赫) 의사의 1920년 9월 14일 부산 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에 대한 폭탄 투척으로 의열단 투쟁을 시작된다. ⓒ 박석분

 
박재혁은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 550번지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이치수(李致守)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누이동생 명진(明珍)이 있었다.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처럼 그는 평범한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출생하였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는 평범한 시대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비오는 날에 태어난 하루살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은 어느 시대에 태어나는가에 따라 길흉화복의 운명이 갈라진다. 박재혁의 짧은 생애와 위대한 의거를 알기 위하여 그의 출생 전후 나라 사정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나고 자란 1890년대는 한국사에서 일찍이 겪어보지 않은 격랑기였다. 개화의 선각으로 알려진 김옥균이 1894년 2월 상하이에서 조정에서 밀파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3월에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이 부패한 관권에 저항하며 전라도 백산에서 봉기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5월에는 일본군이 청군에 이어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의 내정에 개입한데 이어 동학군을 무차별 학살하고, 정부는 뒤늦게 갑오개혁(갑오경장)에 나섰다. 동학군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했으나 묵살되고, 일본군의 침략행위에 맞서 2차 봉기를 결행하였다. 

박재혁이 태어나던 해 3월 29일 전봉준이 처형되고,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정부는 11월 15일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에 반발하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이다. 

박재혁이 한 살이 되던 1896년 2월 아관파천 즉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고, 3월에는 김구가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처단하였다. 명성황후 암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4월 7일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서울에서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인 독립협회가 설립되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칭호와 광무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청국과 사이의 전통적인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이 된 것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하지만 국력이 뒷받침하지 않은 자주독립 선언은 허상에 그치고, 청국은 물론 일본과 러시아, 서양 제국의 먹잇감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박재혁의 소싯적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특별할 것이 없는 서민 가정의 어린이에 대해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박재혁은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나 대한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었다. 15세 때에 국권이 일제에 병탄됨으로써 박재혁은 감수성이 강한 시기에 국치와 일제식민지 초기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불운의 시대에 불우한 삶을 산, 그러나 운명의 승리자가 되었다. 

박재혁이 태어나 자란 부산은 일본과는 남다른 악연이 깃든 지역이다. 

고려말부터 시도 때도 없이 왜구가 침범하여 주민 살상과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은 1572년 4월, 21만 명의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가장 먼저 침공한 곳은 부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부산진성을,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성을,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다대포성을 각각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들 전투에서 주민들은 앞을 다투어 왜군과 싸워 성을 지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전후 조정으로부터 선무원종공신의 칭호와 은전을 받은 사람이 무려 66인이나 되었다.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부산에 조계(租界)가 설치되었으며 일본ㆍ청국ㆍ영국의 영사관이 들어섰다. 

부산은 일본과의 지리적 인접성 관계로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1909년에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여 한국과 일본의 관문이 되었다.

지령(地靈)이 인걸(人傑)을 잉태한다는 말이 전한다. 
굳이 풍수도참설이 아니더라도 역사와 사력(史歷)이 깃든 곳에서 인물이 태어난다. 결코 사막에서 장미는 피지 않는 법이다.

박재혁은 일본과의 운명적인 대척관계에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와 이웃들로부터 옛날의 임진ㆍ정유왜란 이야기, 삼포의 왜구 침략이야기, 성장하면서는 개항장 관련 얘기를 듣고 자랐다. 

박재혁이 15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넉넉치 못한 살림은 어머니와 어린 누이가 삯바느질과 막노동으로 꾸려나갔다. 총명하고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박재혁을 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개화되는 세상에서 자식이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공립학교에 비해 납입금이 적지 않았던 까닭에 어머니의 노고는 그만큼 많아졌다. 

이 학교는 원래 부산진 지역 유지들이 운영하던 육영재(育英齊)를 신학문의 사조에 따라 1908년 사립보통학교로 개편한 것으로, 1909년 4월 당국의 허가를 받고, 1911년 5월 다시 부산진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부산에서는 일찍 개설된 신학문의 요람이 되었다.

박재혁은 부산진보통학교에서 10대의 소년시대를 활기차게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가정사였으나 구김살 없이 활달한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열과 따뜻한 보살핌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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