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영국에서... 다 모이지 않아도 괜찮은 차례상

추석 차례상에 쓴 지방 '현고학생부군신위'...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등록 2018.09.25 16:52수정 2018.09.2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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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이 홀로 전날 엄마가 준비해주고 서울의 직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을 대신해 추석 차례상을 진설했다. ⓒ 이안수

  
이번 추석에는 다섯 가족 중 나와 첫째 딸만 차례상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둘째 딸은 카메룬에서, 아들은 영국에서 8시간 빠른 한국의 추석날 아침을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아내도 근무일이 되는 바람에 차례상에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딸이 차례상을 진설하는 동안 나는 지방을 썼습니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지난 수십 년 동안 써온 같은 지방이지만 지금의 문구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이 문구는 내게 할아버지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차례상 앞으로 모일 수 없는 지금의 라이프 싸이클탓에 우리집은 각기 다른 대륙에서 이렇듯 메시지라는 방법의 마음으로 함께할 수 밖에 없는 평편이다. ⓒ 이안수

 
아버지가 떠나신 지 3년, 여전히 아버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게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경우는 눈빛으로, 어떤 경우는 음성으로...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어떤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현(顯)은 나타남을, 고(考)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학생(學生)은 관직에 있지 않은 사람을, 부군(府君)은 돌아가신 조상을, 신(神)은 신령을, 위(位)는 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은 "배우는 학생으로 사시다 돌아가신 아버지 신령이시여 나타나셔서 자리에 임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지방을 쓸 때마다 관직이 아니라 '학생(學生)'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일생을 배우는 학생으로 사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농사꾼 아버지는 학교에서가 아니라 평생 산과 들에서 일로서 배움을 삼으셨습니다. 너무 이른 새벽에, 너무 늦은 밤에 들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도깨비로 착각했습니다. 그 도깨비가 아버지였습니다.
 

추석날, 아프리카와 유럽에 있는 딸과 아들과의 영상통화. ⓒ 이안수

 
이렇듯 삶이라는 배움에 치열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밤에도 들과 산에 계셨듯, 차례상 앞 대신 직장이라는 배움터에 있는 며느리를, 아프리카의 배움터에 있는 손녀를, 유럽의 배움터에 있는 손자를 더욱 흐뭇해하실 거란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치열한 배움을 독려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추석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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