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조리사' 시인의 "울음 바이러스"

천지경 시인 시집 펴내... "소시민의 소소한 삶" 담겨

등록 2018.09.24 14:18수정 2018.09.27 08:30
4
원고료로 응원
 
a

천지경 시인의 시집 <울음 바이러스>. ⓒ 윤성효

 
경남 진주에 사는 천지경 시인이 첫 시집 <울음 바이러스>(불교문예 간)를 펴냈다. 먼저 시부터 읽어보자.

울음 바이러스


장례식장엔 초고속 전염도를 가진 울음 바이러스가 산다
한 팔에만 상복을 걸친 채 오열을 삼키는 남자
도포까지 갖춰 입은 시신이 관 속으로 안치되자
순식간에 번지는 울음 바이러스
선친의 임종 전 모습이, 불투명한 내 미래가
그들의 흐느낌 속으로 휩쓸리고 있다
죽은 자 위해 차린 거룩한 상 아래에는
고인의 채취가 아픈 사람, 산 자와 거래가 남은 사람이
자신이 다녀간 흔적들을 슬그머니 놓고 간다
향의 목숨 줄 똑똑 끊어버리는 시간은
문상 온 사람들 머리 위를 잠시 배회하다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소멸 된다
발인 날짜 적힌 게시판 안내문은
슬픈 얼굴로 조의금을 기다리고
밤을 새워도 지치지 않는 건
화투짝 시끄러운 뜀박질뿐이다
간간히 흘러나오는 곡소리는 문상객이 왔다는 신호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복을 잘 갖춰 입은 남자는
이따금 분향소를 나와 돌아가는 자를 배웅한다
한순간 오열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에 불과한가
울음 바이러스는 생명이 짧다
 

어떤 '죽음'이든 그 앞에서 인간은 겸허해진다. 그래서 누구나 숙연해지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래서 '울음 바이러스가 산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어딘가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장례식장과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유족은 하늘나라로 간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투명한 내 미래' 때문에 우는 것 같고, '거룩한 상' 차림이라든지, '안내문'에다 '조의금', '화투짝'도 좀 거북스럽다. 그래서 '울음 바이러스 생명이 짧다'고 한 것인가.

박종현 시인은 이 시에 대해 "가장 겸허해지는 순간, 가슴에 자생하는 존재가 눈물이다. 시인은 죽음과 눈물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 모순에 순치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늘 젖어 있다"며 "시인은 가슴 깊은 곳에 고인 눈물을 길러내어 이웃과 세상의 건조된 울음에게 인공눈물을 제공하는 걸 천명으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밝혔다.

엘리베이터 눈

입관실로 가는 젖은 눈이 엘리베이터를 탄다. 서로의 눈 외면한 채 엘리베이터 벽을 고정하고 섰다. 넋이 나간 멍한 눈을 엘리베이터 벽면이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영혼이 방황하는 모습을 많이 본 탓일까? 엘리베이터 스테인리스 눈은 언제나 흐려 있다.


생사의 이별 앞에 초연한 사람은 없다. 오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잔잔한 호수 같다.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슬픔을 자제하는 모습들이 기특하다.
눈물 맺힌 눈 속에 참한 생을 살은 고인의 단아함이 총총히 맺혀 있다. 죽는 자는 남은 자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며 떠났을 것이다. 뭉클하다. 혼백을 소중히 안고 가는 이들을 눈부처에 새겨 넣는다.


이쯤 되면 이런 시를 쓴 시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장례식장 조리사다. 그는 망자가 장례 치르는 동안 영정 앞에 올리는 밥읏 짓고, 문상온 온 산 사람들이 와서 먹을 밥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천지경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부처님은 가장 큰 공덕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공양하는 거라 했다"며 "하루 수백, 수천 명 문상객의 밥을 짓는다. 영가들의 밥까지 15년째 짓고 있으니 그 공덕이 실로 어마어마 하겠다 한다"고 말했다.

'깔끔한 이층 집'에 건강한 남편에다 아들딸을 두었다고 한 그는 "이만하면 불온한 내 공덕 값에 비해 보상은 충분히 받은 셈. 부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망할 년들

여동생과 요양원에 갔다 치매 어머니 모시고 나가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휠체어 태워 모셔다 드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이 어머니 병실인지라
같은 방 동무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누는 얘기가 우리 귀에 들려왔다
"맛난 거 먹고 왔소?
그래 딸들이 용돈은 한 닢 줍디까?"
"망할 년들이 아무도 돈 한 닢 안 주데요"


목소리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자기를 대하는 목소리와 아들과 얘기하는
내 목소리 톤이 다르다고
자기를 대하는 소리에는 앙살이 들어 있고
아들과 얘기하는 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묻어 있다고
맞는 말이다
남편만 쳐다보면 마음고생 몸고생 시킨 것만 떠오르고
아들은 우등생인데다 이쁜 짓만 골라 하니까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지 안간아
 

재미있다. 가족들과 사는 시인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시에 끌어와 놓은 어머니와 남편의 이야기이지만, 시인의 마음은 가족을 부처 대하듯 할 것 같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은 천 시인의 시에 대해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몸으로 쓴 것"이라며 "우리는 어떤 시집에서도 보지 못한 이 시대 소시민의 소소한 삶과, 삶을 향한 그들의 찐득찐득한 애착을 본다.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흔히 봐온 주검으로부터 깊어진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리라"라고 했다.

천지경 시인은 2009년 <불교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 사람

자칭 떠돌이 백수건달로
빵점짜리 가장임을 자책하던 사람
발걸음에 차이는 낙엽 한 겹의 무게로
가볍게 떠나려 했던 사람
빈 통장으로 가난한 새싹에게
문학 장학금을 내밀던 사람
아픈 사람 보면 주머니 탈탈 털어
병원비 보태주던 사람
성실하게 살아 너무 예쁘다고
더 열심히 살라며 토닥이던 사람
힘들지만 시도 쓰고 모임도 나오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라던 사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시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 준 사람
참말로 올곧은 시인 박노정
저녁답 노을로 남은
그리운 스승님
#천지경 #박노정 #불교문예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