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스쿨미투' 대전A여고의 졸업생이 바랍니다

부디 '성평등 감수성'을 배우길 바란다

등록 2018.09.22 17:10수정 2018.09.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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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미투 스쿨미투 운동 ⓒ 이은하

 
지난 18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지역의 20개 진보단체들이 대전시교육청 앞에 모였다. 대전A여자고등학교(아래 대전A여고) 학생들이 폭로한 성희롱·성차별 사태에 대한 대전시교육감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분 전부터 교육청 앞으로 속속 모여 든 20여 명 활동가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준비해온 현수막을 펼치는 손길이 바빴다. 기자회견은 약속 시각에 맞춰 시작됐다.

"지금 당장 옷을 벗고 화장실에 가서 자신을 기다리면 수행평가 만점을 주겠다." "여자가 납치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의 짧은 바지 때문이다." - 대전A여고 스쿨미투 제보 내용

권사랑 대전 여성주의잡지 <보슈> 대표는 대전A여고에서 제보된 내용을 소개하면서 발언을 시작했다. 마이크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몇몇 시민은 무슨 일인가 기자회견장을 바라보기도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교육청 앞을 지나는 시민도 보였다.

'대전교육청은 스쿨미투를 책임 있게 해결하라.'

주황색 현수막을 가득 매운 검은색 활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40대 여성도 눈에 띠었다.

대전A여고 학생들이 성희롱을 폭로한 이유는 분명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더 이상 성차별 행위에 침묵하지 않겠다고 나선 데는 충북여자 중학교에서 불붙은 2차 스쿨 미투 운동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성희롱 폭로 뒤 많은 여성들이 2차 피해를 경험한다. 서지현 검사가 그랬고, 김지은 정무비서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대전A여고 학생들도 그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성희롱 행위자로 지목된 교사들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교사들을 향해, "잘못된 행위를 멈춰 달라"고 외친 건 그래서 대단하다

대전A여고 졸업생의 기억

28년 전, 나도 고등학생 중 한 명이었다.  10대 후반을 스쿨미투가 터져 나온 대전A여고에서 보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 학창 시절을 반추해 봤다. 오래돼 빛바랜 옛 기억 중 성희롱으로 생각될 만한 경험을 찾으려고 애썼다.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좋은 탓에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하게나마 잔상이 떠올랐다. 직사각형 형태의 나무 조각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대전A여고 복도였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데 제일 먼저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이어 만든 복도 바닥을 떠올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찾았다. 무리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뜀박질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수다를 떨거나 쿵쾅 거리며 뛰어다니는 친구들의 모습을 책상 의자에 앉아, 말없이 바라 보곤 했다. 가끔 복도에선 오래된 마루 마냥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대개는 조용히 다니라는 선생님들의 엄포가 있은 뒤였다.

그 당시, 학생들 앞에서 바지허리를 올리는 교사가 있었다. 주로 복도에서였다. 바지가 커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허리춤을 잡을 때마다 엉덩이가 양 옆으로 돌려졌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꺅"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에 "재밌잖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겁을 했다. 몇몇 아이들은 그의 행동을 두고 자기들끼리 수군대기도 했다.

하지만 학창시절, 나는 대전A여고 선생님들을 좋아했다. 민주화 열기가 가득했던 1989년. 선생님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특히 미술선생님은 불의에 저항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전A여고에는 그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 성폭력 학교란 오명을 얻게 됐다.

대전A여고에 바란다

대전A여고 사태를 지켜보면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를 떠올렸다. 100인위원회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이렇다. 진보운동을 내세운 단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이 수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당시 선생님들도 진보이념을 자주 언급하셨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말하진 않았다. 학생들이 공개한 성희롱·성폭력 행위자 리스트에 그들이 있는 건 아닐까 두려운 이유다.

대전A여고가 이번 일을 계기로 성평등 감수성을 배우길 바란다.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되길, 그리하여 높이 뛰어올라 만물을 품는 학교가 되길, 졸업생의 한 명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스쿨미투 #대전스쿨미투 #대전스쿨미투기자회견 #교사성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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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밥 대표이자 구술생애사 작가.호주아이오와콜롬바대학 겸임교수, (사)대전여민회 전 이사 전 여성부 위민넷 웹피디. 전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전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 여성권익상담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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