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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30년, 우리가 몰랐던 그 당시의 풍경

88올림픽 입체적으로 조명한 KBS <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다큐 88/18 >

18.09.18 11:51최종업데이트18.09.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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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 88/18 > 중 한 장면 ⓒ KBS


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80년대 중반, 충북 영동군에 살던 사촌 누나가 서울에 있는 직장을 다니면서 1년 정도 우리집에 함께 산 적이 있다. 사촌 누나는 집에 들어오면 음악을 듣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 누나의 영향으로 나 역시 동요를 들어야 할 나이에 대중가요를 다소 일찍 접했다. 당시 유행하던 높은 음자리의 '바다에 누워',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 구창모의 '희나리', 나미의 '빙글빙글' 등이었다.

나는 멋도 모르고 학교에서 그 노래들을 흥얼거리고 다니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시절 나에게 대중가요는 70년대 김민기나 양희은이 부르던 민중가요처럼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금지곡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갑자기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동요가 아닌 가요를 가르치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노래는 바로 정수라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었다.

노래 '아 대한민국'은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 OST '난 너에게'를 통해 인기가수가 된 정수라의 시원스런 목소리를 통해 시작부터 끝까지 '나라사랑'을 이야기한다. 대중가요라기보단 군가에나 어울릴 법한 선동곡이었다. '아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그만큼 그 시절 대한민국에 서울 올림픽의 성공 개최는 나라의 사활을 걸 만큼 중요했다.  

대대적인 투자로 역대 최고 성적을 올린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올림픽만 성공적으로 개최하면 한국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KBS 화면 캡처


서울 올림픽이 개막하던 1988년 9월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슬슬 학교에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많아진, 소위 '고학년'에 접어드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흙장난을 좋아하고 용돈 100원이라도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뛰어가던 철부지 꼬마였다. 불과 1년 전에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광장으로 뛰어나온 100만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뜨거운 역사적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알 턱이 없었다.

당시 전국은 올림픽 기간 내내 자동차 2부제를 시행했고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9월17일은 학교가 임시휴교를 했다(선생님은 올림픽 개막식 감상문을 숙제로 내주셨다). 그만큼 올림픽은 전국민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성공시켜야 하는 국가적인 행사였고 공짜 휴일을 맞은 나도 친구집에서 놀다가 개막식이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와 개막식을 감상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오늘날까지 스포츠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대회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MBC 청룡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면서 야구에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지만 다른 종목들은 룰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 동안 모든 TV 채널(이래봤자 KBS와 MBC뿐이었지만)에서 올림픽 중계를 특별 편성했고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름 동안 다양한 종목들을 섭렵하며 룰을 익혔다.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갓 열 살을 넘겼던 꼬마는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긴 '아재'가 됐다. 그 사이 7번의 하계 올림픽과 8번의 동계 올림픽이 개최됐고 한국은 하계 올림픽에서 10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내지 못하면 '목표 달성 실패'라고 자책할 정도로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했다. 한국이 이렇게 스포츠에 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역시 서울 올림픽에서의 선전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대기업 총수나 사장 등 고위직들이 각 종목 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 선수단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라는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렸다. 17일 KBS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다큐 88/18>(아래 < 88/18 >)은 서울올림픽 개최부터 개막까지의 준비과정을 담백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하고 있다.

< 88/18 >이 담백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한 서울올림픽 개최의 명암
 

노태우 전대통령(왼쪽)과 이명박 전대통령은 서울 올림픽 준비위원회 위원장과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 KBS 화면 캡처

 

KBS 1TV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 88/18 > 중 한 장면 ⓒ KBS


80년대 초반 한국은 또 한 번 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정권에서는 경제 분야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유치에 나섰다. 그리고 "한국이 언제 준비해 놓고 제대로 한 일이 있는가? 일단 해놓고 길을 찾는 나라다"라는 허화평 전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의 당당한(?) 인터뷰가 이어진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위한 노력 끝에 1981년 9월 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를 52-27로 꺾고 올림픽 개최에 성공했다.  

제5공화국 출범과 올림픽 개최까지의 소식을 다룬 당시 KBS의 자료 화면들을 보면 촌스러운 것은 차치하더라도 마치 북한 방송을 보는 것처럼 정권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특히 한국의 열악한 동네 구석구석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가시권 우선 정비'의 타당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곧 대대적인 올림픽 준비로 이어지고 정권은 올림픽 유치로 인한 경제 효과를 끊임없이 홍보했다. 
 

KBS 1TV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 88/18 > 중 한 장면 ⓒ KBS


물론 올림픽 유치가 한국의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울을 한 바퀴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은 오늘날까지도 수 많은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고 올림픽대로 역시 일일 평균 25만 대의 교통량을 자랑하는 서울시의 대표적인 간선도로다. 그 밖에도 서울 올림픽은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대한민국에 많은 발전을 가져 온 계기가 됐다.

< 88/18 >에서는 올림픽 개최 준비 과정에서의 부작용도 놓치지 않았다. '가시권 정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상계동 200여 가구의 철거와 강제 이주 같은 비극이 있었고 잔업과 특근 수당을 합쳐 12만 7000원의 월급을 받는 근로자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다뤘다. 드라마 <제5공화국>, 영화 < 1987 > 등으로 더욱 유명해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역시 < 88/18 > 후반부에 중요하게 등장한다. 

< 88/18 >은 30여 년 전 고 이주일, 가수 민해경 등이 '은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2008년의 가상 뉴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방청객들은 백두산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고 통일 후 세계적인 강국이 된 대한민국을 상상하며 웃음을 짓는다. 서울 올림픽이 개막한 지 30년이 지난 2018년, 우리는 전화기를 컴퓨터 대신 사용하는, 당시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1988년에 상상하던 2018년이 모두가 원하는 행복한 세상이 됐는지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KBS 1TV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 88/18 > 중 한 장면 ⓒ KBS

서울올림픽 KBS특집다큐 8818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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