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멋진 '블루'가 야만의 색이었다니

[서평] '컬러의 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색의 이야기들

등록 2018.08.14 09:43수정 2018.08.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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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말> 표지 ⓒ 윌북


유독 한 가지 계열의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검정색, 빨강색, 핑크색, 보라색, 노란색 등. '무난한' 색은 아니다. 초록색, 파란색, 갈색, 회색보다는 튀는 색깔이랄까. 여하튼 색은 그 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난 어떤 한 가지 계열의 색을 좋아하진 않는다. 웬만한 모든 색에 감탄하고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 모든 색들의 '파스텔 톤'을 좋아한다. 원색의, 진하고, 탁해보이는 느낌보다 톤이 다운되고, 흐릿하고, 힘을 뺀 듯한 느낌을 좋아한다. 그런 색들은 보고 있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종종 마치 나를 다른 어딘가로 데려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색은 정녕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어딜 보아도, 그 어떤 풍경 또는 물건을 보아도, 필히 볼 수밖에 없는 게 '색'이다. 그걸 하나하나 보고 느끼고 표현하고 호불호를 말할 수 있는 건 가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출판편집자로서 책을 만들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표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다름 아닌 색이다. 매일 축복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 축복이 주는 색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걸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컬러의 말>은 <이코노미스트> 미술 분야 전문 편집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75가지 컬러의 숨은 비밀을 파헤쳐 짧게 기술해 놓은 책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매력적이거나 중요하거나 불쾌한 역사가 깃든 색들인데, 간략한 역사와 성격 묘사 중간 어딘가에 속하는 이야기들이다. 책 그 어딜 펼쳐보아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뿐이다.

아이보리는 상아색의 다른 말이다. 상아는 바다코끼리, 일각고래, 코끼리 등 거대 포유류의 엄미를 가리키는데, 오직 특권층을 위해 자라났다고 한다. 몇천 년 동안 고급 장식 재료로 쓰인 상아, 이런 수요 탓에 1800년대만 해도 2600만 마리에 이르렀던 코끼리의 수는 20세기에는 몇십 만 마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야생 코끼리는 머지 않아 멸종할 것이며 바다코끼리 또한 멸종 위기 동물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 한다.

서양은 파란색을 폄하해왔다고 한다. 로마인들에게 파란색은 야만, 애도, 불운을 상징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파란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파란색의 위상은 12세기 들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신의 색'이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밝은 파란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는데, 중세에는 옷 색마저 바꿔버렸다고 한다.


우르두어로 '흙'이라는 뜻의 카키는 군대의 상징과도 같다. 1846년 인도군 이동 수비대를 양성한 해리 럼스덴 경이 처음 고안했다고 여겨지는 카키색 군복은 '흙의 땅에서 병사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는 혁신적 생각의 작품이다. 몇천 년 동안 군인은 상대를 겁주기 위해 눈을 사로잡는 복식을 차려 입어왔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컬러들 이야기

저자는 익숙한 컬러들뿐만 아니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컬러들 이야기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 컬러들 모두 익히 아는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초록, 검정 등의 계열에 속해 있음에도 말이다. 몇몇은 아이보리처럼 터무니 없이 고급지고, 몇몇은 파란색처럼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으며, 몇몇은 카키처럼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과 함께 했다.

노랑 계열의 인디언 옐로는 18세기 말에 동양에서 유럽에 상륙했다. 이 컬러에는 오줌 비슷한 냄새가 났다. 1880년에 탐험가이자 식물학자인 조지프 후커 경이 나섰다. 인도 사무부의 도움까지 받아서 이 색이 동물 오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으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다. 2002년에 이 의문을 추적해보았지만 허사였다. 현재 인디언 옐로 안료는 희미한 오줌 냄새를 풍기며 큐 왕립식물원 수장고에 남아 있다.

빨강 계열의 코치닐은 연지벌레라는 아주 작은 생물체로 만들어낸다. 1파운드의 코치닐을 만드는 데 말린 연지벌레 7만 마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부터 써왔다고 한다. 스페인이 그곳을 침공한 후로 금, 은과 더불어 스페인 제국의 확장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게 바로 코치닐이다. 지금도 화장품 및 식품 산업에서 쓰이는 코치닐은 연지벌레에서 추출한다.

갈색 계열의 머미는 미라 가루이다. 이집트에서 삼천 년 동안 일상적인 장례 절차로 삼았던 그 미라 말이다. 이 진한 갈색의 가루는 만평통치약으로 쓰였고, 화가들의 팔레트에도 자리를 잡았다. 미라 가루는 충격적이지만 20세기까지 쓰였는데, 1810년 문을 연 런던 화구상 C. 로버트슨에서는 1960년대에 남은 머미가 소진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컬러의 말 :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이용재 옮김,
윌북, 2018


#컬러의 말 #컬러 #역사 #성격묘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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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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