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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 머리의 사이코패스... 이 영화가 말하는 인생론

[담론으로 보는 영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 인생의 불확실성

18.08.13 14:07최종업데이트18.08.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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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요상한 제목의 영화가 있다. 코엔 형제 감독이 만들었고 2008년 개봉했는데 여전히 인기가 많으며 지난 9일 재개봉됐다.

이 영화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의 바가지 머리는 그다지 웃기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가 워낙 긴장감이 넘치기에 하비에르 바르뎀에게서 미적 불일치를 느낄 여유가 없는 탓이다. 사실, 영화를 보다 보면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톤 쉬거의 바가지 머리를 들여다보고픈 충동마저 든다. 저 바가지를 들어내면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분)의 머리는 무엇으로 차 있을까?

안톤 쉬거의 머리는 무엇으로 차 있는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작중에서 안톤 쉬거는 악랄하고 자비 없는 사이코패스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자기 나름의 신념이 있으며, 그 신념과 좋은 머리를 합쳐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 그래서 경찰들은 안톤 쉬거를 검거하지 못한다. 남들과 사고방식도 다른데, 머리마저 좋으니 그의 행적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는 우연한 기회에 잠자는 숲 속의 안톤 쉬거를 건드린 르웰린 모스(조시 브롤린 분)가 쉬거의 행적을 쫓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안톤 쉬거는 그런 르웰린 모스를 보기 좋게 비웃으며 역으로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추리 소설에서의 탐정, 범인과도 비슷하다. 범인은 능수능란하게 도망 다니며 탐정을 위협하고, 탐정은 능수능란하게 당하면서도 범인을 위협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양쪽의 힘이 대등할 때만 가능한 법,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쉬거의 힘이 모스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양쪽의 힘겨루기처럼 보이던 영화는 어느 순간 안톤 쉬거 혼자만 남은 채로 진행된다. 이때 영화를 보던 우리는 기분이 묘해진다. 주인공이라 생각하던 모스가 죽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스가 아니라 쉬거였던 셈이다. 혹은 모스에서 쉬거로 주인공의 자리가 넘어가는 게 영화의 본 목표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살해 목표가 사라진 쉬거는 잠깐 방황하는데, 이내 죽은 모스의 아내에게 달려가게 된다. 어딘가로 향하던 쉬거는 갑작스레 자동차에 치이게 된다. 이때 영화를 보던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분이 묘해진다. 세상 무적처럼 보이던 쉬거가 깽깽이 발로 아파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관객은 작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쉬거를 '재앙' 혹은 '불행'과 같은 무언가로 설정했을 것이고, 작중 인물들의 말처럼 쉬거는 행동에 아무런 이유가 없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게다가 쉬거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삶은 확률에 불과하다고 친절하게 말해주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모스는 불행을 잘못 건드렸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처럼 보인다. 관객이 당황하는 이 두 가지 순간은 영화의 주제의식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것도 아니고 범인에게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추리나 인과응보 쪽의 쾌감을 얻기는 힘들다. 다만 관객에게는, 갑작스러운 곳에서 서로가 이어지는 우연성과 막연하게 다가오는 총성의 공포만이 남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카메라 화면 밖에서 소리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안톤 쉬거처럼 '인지 밖의 무언가'다. 그리고 이 인지 밖의 무언가는 이제 곧 닥쳐올 것이 확실한데 당장 대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띤다.

작품 내내 안톤 쉬거의 등장은 '예고' 된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든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서로를 쫓든 간에 안톤 쉬거의 압박감이 상존한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은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의 머릿속에 남아 안톤 쉬거의 불확실성을 각인시킨다. 말하자면 관객은 스스로 재앙이라 여기던 안톤 쉬거를 줄곧 상기해 보게 된다. 결국 안톤 쉬거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경험은 불확실함에 대한 자아 성찰이다.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는 노인들, 늙는다는 것은 필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노인을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로 설정한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계속 변화하는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게 된다. 영화는 우연히 엮인 이들이 '우연의 필연성'으로 줄곧 나아가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내민 모스의 손길이 쉬거의 공기총으로 바뀌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하며 작품을 보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젊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모스와 쉬거, 두 사람을 조사하는 경관 에트 톰 벨(토미 리 존스 분) 또한 중년 이상의 나이이다. 갱단이 고용한 청부살인업자 카슨 웰스(우디 해럴스 분)도 청춘은 아니다. 결국 작품에서 청춘으로 부를 만한 건 마지막에 쉬거에게 셔츠를 팔아넘기는 아이들뿐이다. 영화는 마지막에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을 확정 짓게 된다. 그들의 미래는 그저 카메라 밖으로 사라진다. 아이들이 떠나감과 함께 쉬거도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막연하게 절대 악으로 규정되던 쉬거 조차도 결국에는 자동차에 치인다는 점에서,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발버둥 치던 노인들은 '모두' 변화를 거스르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사람은 늙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늙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경관 에드 톰 벨은 은퇴할 나이가 되어 쉬거를 쫓을 의지를 상실한다. 반면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살인마 안톤 쉬거는 이곳저곳 동분서주하며 르웰린 모스의 돈 가방을 쫓는다. 그리고 이도저도 못한 채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했던) 저항을 반복하는 르웰린 모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는 퇴역 군인으로서 돈 벌기에 적합한 재능은 없었고, 그리하여 훔치게 된 돈 가방은 자신의 유일한 미래인 아내를 위협하게 된다. 말하자면 안정된 직업이나 안정된 신념 둘 중 하나라도 없는 모스가 방황하는 것은 무척 당연하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줄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불확실함은 연쇄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비관으로 모스는 갱들의 돈을 훔친다. 그 갱들의 돈은 안톤 쉬거와 연결되어 쉬거가 모스를 쫓게 된다. 여기까지는 우연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과정은 명확하게 인과다. 의문의 살인 현장에 경찰력이 개입하고, 그 사이에 두 사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쫓는다. 이때 경찰과 쉬거는 목표를 끝까지 추격한다는 점에서 같고, 호텔에서 모스의 흔적을 찾는 순서가 다르다. 그리고 마침내 둘 중 하나는 죽게 된다. 말하자면 우연으로 시작된 이 관계는 순서가 다르기는 해도 명확하게 인과성을 띠게 된다.

심지어 모스가 사망한 장면에서 누가 모스를 죽였는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데, 그 죽음은 모스 자신이 초래한 것이므로 사실상 누구한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있고, 그 죽음으로 아내 또한 연달아 죽는다는 결론이 남는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은, 과정이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연이고 결과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인과다.

우연과 인과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불확실함을 보여주는 키워드다. 안톤 쉬거가 어느 가게에서 동전 던지기를 하는 장면이 그것을 말해준다. 쉬거는 가게 주인에게 동전의 짝을 맞추면 살려주겠다며 선택을 강요하는데, 가게 주인이 답을 맞추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연은 없고 당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그 동전의 앞 뒷면은 손바닥으로 가려져 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동전이 던져지는 순간은 우연이지만 바닥에 내려앉은 순간은 명백하게 인과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생존하려는 영화다. 노인들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행동한다. 이 영화의 박진감은 근본적으로 생존의 공포에 기인한다. 이 영화가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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